길 위로 내몰린 사람들, 길 위로 나선 사람들
작년에 동명의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았던 작품이었던 만큼 영화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이 책의 제목을 본 순간 아무런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집어 들었습니다.
길 위에서 떠돌면 사는 사람들, 그 광활한 대륙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좀 더 보고 싶었지만 영화는 화면과 시간이라는 한정된 프레임으로 인해서 그 속을 충분히 깊숙하게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문득 책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들었습니다.
영화는 밴에서 사는 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녀를 따라서 흘러갑니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잘 엮어놓은 하나의 이야기인 것이죠. 책은 조금 다릅니다. 책은 저자 제시카 브루더가 밴에서 생활하면서 북미 대륙에서 유랑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취재하고, 그 속에서 알게 된 이야기들과 취재한 결과들을 엮은 글입니다. 영화가 일종의 소설과도 같았다면, 책은 다큐멘터리 같달까요.
영화가 워낙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겠지만, 중심을 관통하는 메시지와 느낌은 일맥상통합니다.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기회의 땅 미국에서, 그 경제 시스템 때문에 길 위로 내몰리게 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이용하고 있는 미국의 경제시스템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짚어보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 시즌에만 많이 필요한 물류 노동자들을 임시로 고용하는 아마존이 그 대표적인 사례겠죠.
책에서 조금 더 깊숙한 부분도 보여줍니다. (상대적으로) 풍요 속에서 삶을 시작한, 스스로 노력해서 성취라는 것을 제대로 일궈본 적 없는 젊은 세대들과, 길 위로 내몰렸지만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삶을 헤쳐나가는 기성세대들의 노동윤리를 비교하며 보여주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불평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과, 불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에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 그 두 집단의 차이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시스템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에 저항할 것인지, 순응할 것인지는 각자 선택해야 할 몫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미국이라는 나라는 주차를 할 만 땅이라도 넓고, 어디든 찾아가면 기간제로도 일할 수 있는 임시 일자리라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좁디좁은 우리나라에서는 저런 삶의 방식을 생각도 하기 어렵겠죠. 동서남쪽으로는 바다로 막혀있고, 북쪽으로는 북한으로 인해 섬처럼 갇혀있는 이 작디작은 나라에서는 저런 기회도 갖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현실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낙천주의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이왕이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대책 없이 일단 고민을 미뤄두는 것은 사실 도움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책에서 등장하는 노매드들의 철학 관통하고 있는 미국식 긍정적 사고방식은 꽤 묵직한 메시지를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큰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행복이 반드시 돈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다시 상기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며칠 동안 조금씩 손에 잡힐 때마다 나누어 읽었습니다. 대부분을 차를 타고 소풍을 나가서, 특히 캠핑을 나가서 쉘터를 피칭한 이후에, 아니면 이른 아침에 새소리에 잠에서 깨어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읽어서 그런지 한 구절 한 구절이 주는 무게감이 사뭇 다르더군요.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된 존 스타인백이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글도 좀 찾아봐야겠습니다. 날씨도 점점 풀리고 있는데 캠핑 중에 읽으면 좋을 것 같네요.
27. 남의 집에서 왕을 모시면서 살기보다는 내 집에서 왕으로 사는 게 낫지요.
38. 처음 시내에 차를 대고 잠을 잘 때는 끔찍한 낙오자나 홈리스가 된 듯 느껴지죠. (중략) 하지만 그게 인간의 위대한 점이에요. 우리가 어떤 것에나 익숙해진다는 거요.
72. 어떻게 남은 평생 동안 일을 하지도 않고 아이들한테 짐이 되지도 않으면서 살아갈 것인가?
103. 나는 아마존 같은 회사가 왜 육체적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더 적합해 보이는 일에 나이 많은 지원자들을 더 환영하는지 궁금했다. "우리가 아주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니까 그렇죠. (중략) 우린 뭔가를 하기로 하면 그 일을 해내려고 최선을 다하잖아요." (중략) 캠퍼 포스 운영자들은 나이 많은 노동자들이 뛰어난 노동 윤리를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되풀이해 말한다.
109. 현재 젊은 베이비붐 세대부터 시작해 그 뒤로 이어지는 세대들은 은퇴 후 생활수준 하락 없이 살아갈 능력 면에서 그 전 세대들은 은퇴 후 생활수준 하락 없이 살아갈 능력 면에서 그 전 세대들보다 떨어지고 있어요.
149. 밥은 극도의 검소한 생활이 마치 자유로 가는 길처럼 느껴지게 글을 썼다. 그것은 박탈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180. 공짜라고 하면 뭐든 사람들은 거기서 쓸모를 찾아낼 거예요. (중략) 어떤 사람은 심지어 쓰레기까지 가져갔어요.
215. 새들이 공원에서 살 수 있다면, 혹은 도시에서도 살 수 있다면, 나라고 왜 못하겠어요? (중략) 사람이 살아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곳에서만 살아갈 필요는 없어요.
245. 이제는 생존만 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삶을 즐기고 있어요. (중략) 그 말은, 그러니까 이런 거죠, 누구나 노년을 풍요롭게 보내고 싶어 하잖아요. 그냥 하루하루 살아남는 게 아니라요.
265. 그러는 동안 린다는 로리가 푹 빠져 있던 '찰리와 함께한 여행'을 로리에게 선물했다. 존 스타인백이 자신의 프렌치 푸들과 함께 캠핑용 픽업트럭을 타고 여행한 이야기를 담은 그 책은 노매드들 사이에서 인기 있어서, 군데군데 귀퉁이가 접힌 책들이 손으로 전해졌다. (중략) 타이어 떠돌이들의 랑데부 캠프파이어에서 만난 한 남자는 내가 아직 '찰리와 함께한 여행'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중략) 이 서브컬처에서 문학적 정전의 반열에 오른 다른 작품들로는 윌리엄 리스트 히트-문의 '블루 하이웨이', 에드워드 애비의 '태양이 머무는 곳, 아치스', 존 크라카우어의 '야생 속으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가 있다.
271. 그 격려 연설은 초 현실적이었지만,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결국,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란 전형적으로 미국적인 대응 기재이며, 사실상 하나의 국가적인 오락이다. 작가인 제임스 로티는 대공황 시기 동안 미국을 여행 하며 길 위로 내몰린 채 일자리를 찾게 된 사라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1936년 '더 나은 삶이 있는 곳'에서, 자신의 인터뷰 대상자 중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토록 확고부동하게 밝은 태도를 보여준 것에 몹시 충격을 받았다고 썼다.
283. 사람들 대부분에게 밴에서 보내는 첫날밤은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서 몹시 멀리 벗어나는 경험이라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중략) 두려움 때문에 소리 하나하나가 커다랗게 들릴 테고, 잠도 별로 자지 못할 수 있습니다.
295. 숲 한가운데 전기도, 수돗물도, 차도 없이 갇혀 있게 된다면 당신은 아마도 그 상황을 악몽이라거나 비행기 사고나 그 비슷한 무언가가 일어난 뒤 벌어진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묘사할 것이다. 하지만 백인들은 그걸 캠핑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