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4년 전 이야기
얼마 전에 일이 아닌 여행으로 군산에 다녀왔습니다. 군산 구도심을 걷다 보면 초원 사진관을 볼 수 있습니다. 건물 이름은 사진관이지만 진짜 사진관은 아니죠. 20년도 더 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 세트장을 관광지로 관리하고 있는 곳입니다. 몇 년 전 출장 차 군산에 왔을 때도 잠깐 둘러보았었는데 이번에도 잠시 들려보았습니다. 크게 볼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20세기 끝자락을 잠시 추억해 볼 수 있어서 들렸다고나 할까요. 가만히 사진관 내부를 둘러보면서 한석규와 심은하의 영화 속 사진을 보고 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곳이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 있을까. 점점 이곳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텐데.'
사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심은하라는 배우를 잘 모르지 않을까요. 한석규의 젊은 모습도 어색할 수 있고요.
그렇게 군산을 다녀와서 그랬을까요. 초원 사진관 근처에 있는 이성당 빵집에서 사 온 야채빵과 단팥빵을 한 점 찢어 입에 집어넣으니 이 영화를 한 번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워낙 오래전에 보아서 어렴풋한 느낌만 남아있을 뿐, 제대로 내용이 기억나지도 않을뿐더러, 예전의 그 골목길을 다시 보고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그렇게 새롭지는 않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과 풋풋하게 피어오르는 한 여름의 사랑이야기, 딱 황순원의 소나기입니다. '8월'이라는 한 여름을 제목에 집어넣은 것도 이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이지 않을까요?
주인공 한석규는 날이 밝을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듯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해가 떨어지면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앞에 두고 두려움과 슬픔과 같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기에 사랑이라는 자연스러운 감정조차도 사치가 되고, 욕심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잔잔하게 머금고 있는 미소 뒤에 보이지 않게 드리워진 그늘은 연기한 한석규 배우의 표정을 하나씩 뜯어보는 것도 이 영화의 중요한 감상 포인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심은하 배우를 화면에서 보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은 활동하고 있지 않지만, 한 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배우 중의 한 명이었으니까요. 20대 초반의 발랄한 사회초년생을 연기하는 그녀의 연기가 조금 어색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기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20대는 아직 어른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회적 보호의 대상으로 비치기도 하고, 여전히 부모님의 보호 아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90년대의 20대는 지금보다는 '제법 어른'이었죠. 아직 준비는 충분히 되지 않았지만 사회 속에 던져진 그런 존재 말이죠. 아주 어릴 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극 중의 한석규와 심은하보다 더 나이를 먹은 뒤에 이 영화를 보고 있자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한 시간 반 정도 되는 영화, 극장에서 보기에는 조금 짧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추억에 빠져서, 지금은 과거가 되어버린 골목길을 둘러보기에는 괜찮았습니다. 스피디하고 자극적인 영화는 아니었지만, 눈을 사로잡는 그런 요소들이 없었기 때문에 더 깊숙이 추억 속에 젖어들 수 있었습니다.
최신 영화를 좇아가기에도 바쁜 시대지만, 가끔은 이렇게 예전의 기억들을 짚어볼 수 있는 영화를 좀 더 찾아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