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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완느 Nov 19. 2024

내가 사랑하는 시간들

버스를 타고 앉아 창가를 바라보며 홀로 먼 곳으로 향하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버스에 타면 귀에 있던 이어폰을 빼고서 주변의 소리를 귀에 담는다. 칙- 하며 버스 정류장마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 거린다. 가끔은 승객과 버스 운전수 사이의 사소한 실랑이 소리도 들린다. 연륜 있으신 분들의 큰 통화 소리에 낯선 사람들의 일상이 들린다. 응답하라 1988 드라마에서처럼, 골목 어귀 동네 아줌마들이 나누던 그 시절의 담소를 동네 버스에서 들을 수 있는 것 같아 정겹다.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 익숙한 풍경들을 스쳐지나 낯선 곳으로 향할 때, 마음속 요란함 마저 떠나보내는 것 같아 홀가분함이 느껴진다. 장롱면허조차 없는 내게, 버스는 지겹고 가끔은 도망치고 싶은 일상으로부터 탈출 시켜준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사랑했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한다.


세상의 소란스러움이 잠잠해질 무렵 밤의 고요함을 좋아했다. 고교 시절, 매일 밤 10시면 독서실에 앉아 눈에도 들어오지 않을 문제집 한 권 펼쳐놓고, CD 플레이어를 틀어 이어폰을 꽂는다. 조성모 2.5집 타이틀곡, '가시나무'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감수성에 젖어있곤 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땐, 부산에서 경기도의 한 지방으로 상경해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밤 10시 무렵이면 기숙사 곳곳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 어슴푸레한 밤이 찾아오던 그 시각, 홀로 외국어 공부를 한답시고 아무도 없는 기숙사 시청각실로 향한다. 헤드셋을 쓰고 외국어로 흘러나오는 방송들을 듣고 있던 공간의 적막함이 좋았다. 이십 대 중반 자취하던 시절, 퇴근 후 저녁을 차려먹고 샤워를 하고 나면 어김없이 밤 10시 무렵이었다. 이어폰 대신 누군가 떠들어대는 텔레비전 방송이나 라디오를 틀어놓고선, 노란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노트북을 펼쳐 일기를 쓰는 시간을 아끼고 사랑했다.


삼십 대가 되어 결혼을 했고, 출산을 하고선 적막하고 고요했던 밤 시간은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남편이 처음 자영업을 시작했던 그때, 우리가 살던 곳은 18평 방 두 칸의 복도식 아파트였다. 안방 문과 마주하는 곳에 간이 식탁이 놓여있었고, 음악을 듣거나 가끔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시간을 애써 찾아 일기라도 한편 끄적이던 공간이었다. 문 하나 사이를 두고 밤에 화장실이라도 들락거리는 날이면 언제든 남편의 시선이 닿아 내 마음 들킬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더이상 혼자 있는 공간의 적막함 마저 바라는 건 사치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만의 시간을 갈망하며 어느 도시에 이방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맨다. 지난한 부부 싸움이 있거나 마음 복잡한 시간들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버스를 탄다. 바쁘게 오가는 낯선 사람들의 일상을 바라보다 한 시간쯤 떨어진 정류장에서 하차 벨을 누른다. 지하 출구와 연결된 프랜차이즈 카페를 찾아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을 시키고 스틱 설탕 한 개를 털어 넣는다. 그리고 핸드폰의 즐겨찾기 목록에 친구의 이름을 눌러 마치 앞에 있는 것 마냥 수다를 떤다. 어느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낯선 도시의 이방인이 되는 시간이다.


일 년 전 이사를 왔다. 다른 동네로 어린이집을 등하원 했던 터라, 올해 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서야 동네에서 처음으로 아침을 맞이한다. 아이 등교길을 마중하고선 한 시간 쯤을 걸어 옆 동네 천장은 높고 테이블 간격이 넓은 한적한 카페를 찾았다. 비록 커피 맛은 씁쓸했지만 홀로 있기엔 충분한 곳이었다. 아이의 등교 시간에 맞추어 남편 아침을 차려놓고, 가방에 태블릿과 책 한 권을 욱여넣고 나도 서둘러 그곳으로 출근한다. 남편 점심시간 전까지 두 시간 남짓 비는 그 시간. 철저한 타인으로서 보낼 수 있는 그 시간을 여전히 아끼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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