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슴푸레한 저녁이 찾아 올 무렵 발걸음은 언제나 집으로 향한다. 어렸적 부터 해질녘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오후 네시면 엄마의 저녁 준비가 시작된다. 그녀는 두 시간 남짓 종종걸음으로 좁은 부엌을 바삐 움직이며, 밥을 짓고 동생과 내가 좋아하는 자반고등어를 굽고 달걀말이를 한다. 여섯시면 엄마와 나 그리고 남동생이 셋이 둘러앉아 식탁에서 저녁을 먹는다. 주말부부였던 아빠는 토요일 오후 세시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토요일은 일주일에 한번,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 앉아 저녁을 먹는 날이다.
어느 한 날, ABC 초콜릿 한 봉지가 식탁 위에 놓여있었다. 엄마가 웬만해서는 사두지 않던 초콜릿이라 횡재한 기분으로 봉지를 뜯어 먹고 있는데, 엄마가 아빠 몫을 남겨두라며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그날은 발렌타인데이였던 것이다. 우연히도 아빠가 퇴근하던 그 주의 토요일이 발렌타인데이였나 보다. 눈치도 없이 초콜릿 한봉지를 동생과 함께 입으로 털어넣을 뻔 했다.
초등 학교 시절, 오후 네시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어두워지기 전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매일 반복되는 엄마의 말처럼, 우리는 어느 곳에 있더라도 노을 지기 전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나에게 집은 어두워지기 전 돌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여자 홀로 에너지 넘치는 사내아이와 고집 센 딸아이를 데리고 일주일을 홀로 보내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다. 어둑해지기 전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이었겠지 싶다. 일주일에 한번 엄마는 아빠를 만나 저녁 식사를 하고, 토요일 저녁엔 차를 타고 삼십분 거리의 시댁을 찾아뵙고, 일요일은 시댁의 농사를 돕느라 온종일 비닐하우스에서 보내는 엄마의 고단한 마음도 지금에서야 헤아려 본다. 그렇게 내게 집은 어둑해질 무렵 돌아가야 하는 곳이었고, 돌아가는 그곳 한 귀퉁이엔 엄마의 고단함이 놓여있었다. 삼십 년쯤 흘러 이젠 내가 그때 엄마의 나이가 되어 종종거리며 해가 지기 전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내게는 해가 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다. 한귀퉁이에 놓인 엄마의 고단한 마음 옆에, 내 마음도 살포시 놓아본다. 엄마의 것에 비하면 초라할 만큼 작을 테지만, 엄마의 고된 마음 외롭지 않게 내 마음 놓고선 그때의 엄마를 위로해 본다.
어린 시절 시장이 붙어있는 동네에 살았다. 우리 집은 방앗간 건물의 2층이었다. 집을 갈 때면 늘 참기름을 짜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나무로 된 현관 문을 열고 들다어가면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다. 우리 집 옆에는 50원, 100원을 들고 가면 쌕쌕바와 쌍쌍바 하나를 사 먹을 수 있는 작은 슈퍼가 있었고, 슈퍼 옆에는 수예점이 있었다. 지금의 내가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 종종 찾는 카페처럼, 엄마는 매일 같이 수예점에서 뜨개질을 하며 우리를 기다렸다. 유치원을 마치고 피아노 학원을 다녀오면 엄마는 우리 남매의 손을 잡고 목욕탕 건물 1층에 있는 미화당에서 공산품들을 사고 동네 시장에 들러 저녁 거리 장을 봐서 저녁을 차렸다. 그렇게 엄마 손잡고 늘 시간 맞추어 돌아가야 하는 곳이 집이었다. 결혼을 하고선 내가 엄마가 되어 아이를 하원 시키고 함께 동네 마트를 들러 저녁거리를 사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종종거리며 사는 내게 친구는 수화기 너머로 새장 속에 같은 새 같다는 말을 건넨 적이 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너는 훨훨 날아가 버릴 거라고. 결혼하고서 마음 한구석 설명할 길이 없던 답답함이 이해받는 기분이었다. 엄마의 고단한 마음도 이쯤이었을까.
결혼생활 10년 차쯤에 들어서가고 있다. 해 질 녘이면 어김없이 무엇을 하다가도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렇게 내게 집은 여전히 해 질 녘에는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다 한들, 마음 한 귀퉁이에 숨겨놓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그곳이 집이다. 이젠 엄마 대신 남편이 있다.
가끔은 여전히 새장 속에 새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날이 없다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그 곳은 바로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