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베 얀손 <두 손 가벼운 여행>
토베 얀손 <두 손 가벼운 여행>
여행의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순간의 깊이. 어떤 기억은 어떤 10분은 다른 수백수천의 시간보다 뚜렷하게 남아 나를 만든다. 오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다가 문득, 고성의 카페에서 읽었던 토베 얀손의 책 속 일본 소녀의 편지가 떠올랐다. 무민의 작가 토베 얀손이 실제 그의 팬이었던 소녀와 교환했던, 소녀의 편지를 책의 첫 챕터로 실은 것이다.
깨끗하고 아련했던 그 여운이 가슴에 휘몰아쳐 나는 내가 필기해 놓은 구절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메모장에도, 에버노트에도, 노트에도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분명 필사해 놓았는데 정작 어디에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객관적으로 누가 보기에 그 글이 어땠건 간에 빈둥거리며 휴일을 보내던 한 사람의 하루에 한 토막을 이렇게 간절하게 만든 것만으로, 그 글을 찾지 못하면 어쩌나 불안하게 만들고 마치 담배나 카페인의 금단 현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책장과 수첩과 핸드폰의 메모와 구글 문서를 다 찾아 헤매게 만든 것만으로 그 글의 힘이 증명된 것은 아닐지.
나는 잠시 두려웠다. 그 문장들을 다시 보지 못할까 봐. 영영 그 여운만 남아있을까 봐. 그런 만약이 날 두렵게 만들었다.
그 편지를 보고 나는 하이쿠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그녀가 꿈꿨던 작가가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예전의 소녀에 대해 궁금해졌고, 구글로 그녀의 이름을 혹여 등단을 했을까 하는 마음으로 찾아봤지만 끝내 실마리를 찾지 못했고. 혹여 작가가 되지 못했다면 그 소녀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나의 꿈이 무너진 것처럼 가슴이 시렸다.
그런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을 읽게 된 사실이 행운으로 느껴져, 내 손에 당장 어떤 보물에 쥐어진대도 이 문장이 주는 떨림과 세계를 보여주지 못할 것이라고 나를 충만하게 만드는 문장들. 그 모든 부귀영화들을 무채색으로 만들어버리는 문장들.
결국 나는 토베 얀손의 책을 검색하고, 그 책의 이름이 <두 손 가벼운 여행>이었다는 걸 기억하고, e-book 미리 보기로 다행히 가장 첫 챕터를 장식한 소녀의 편지. 편지 교환 챕터를 모두 읽을 수 있었다. 그 8편의 편지가 내 마음에 생경한 공기를 불어넣는다. 나는, 잊고 있던 정서를 다시 기억하며 그 소녀를 알기 전 내 모습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한다.
얀손 선생님께
저는 일본 소녀예요.
제 나이는 열세 살 하고 두 달이에요.
1월 8일에 열네 살이 돼요.
엄마가 계시고, 여동생이 둘 있어요.
선생님이 쓰신 책은 모두 읽었어요.
읽고 나면 한번 더 읽어요.
흰 눈을 떠올리고, 혼자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돼요.
도쿄는 아주 큰 도시예요.
저는 혼자 영어를 배우는데, 아주 열심히 공부해요…..
(중략)
새로운 하이쿠를 하나 보내 드릴게요.
멀리 떨어진 푸른 산을 바라보는 늙은 여자에 관한 시예요.
그 여자가 어릴 때는 그 산이 보이지 않았죠.
이제는 그 산에 갈 수 없고요.
아름다운 시예요.
부디 건강하세요.
(중략)
맞아요. 그렇지요. 나이가 들어야 글을 쓰는 건 아니에요. 써야 하기 때문에 쓰기 시작하는 거지요.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 아니면 자신이 갈망하는 것, 자신의 꿈, 미지의 무엇에 대해서 말이에요.
오, 사랑하는 얀손 선생님. 그리고 기록하는 것은 오직 기록과 자기 자신 사이의 문제이므로 다른 사람들한테, 또 그들이 뭐라고 생각하고 이해하는지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죠.
그것만이 옳은 길이에요. ….
다미코
(중략)
하루 종일 눈이 왔어요.
눈에 대해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일본에서는 집안에서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이 되면
여행을 할 수 없고,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무슨 뜻인지 선생님께서 이해하셨으면 해요.
감사해요.
중국의 위대한 시인 랑스위안이 쓴 시를 보내드려요.
황추이와 알프 헨릭손이 선생님의 언어로 번역했지요.
들거위의 외침은 울리는 바람에 실려 날카롭고,
아침엔 눈이 많아 구름 끼고 춥네.
가난한 나는 너에게 줄 작별 선물이 없구나.
너를 어디건 따라갈 푸른 산 외에는.
다미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