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오후, 서울 병원에 오셨다는 얘길 듣고 뵙기를 청하였으나 어차피 면회가 안된다하여
"내일 오전에 고모 얼굴이라도 뵐게요."
하고 어제 아침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부지께 전화가 왔다.
"니 안가도 된다. 한 시간 전에 돌아가셨단다."
십년에 한 번도 겨우 보던 고모부 얼굴을 돌아가시기 전에 굳이 뵙고자 했던 것은, 사회생활 20년을 훌쩍 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된 고모부의 배려와 배포 때문이었다.
봉화에 촬영을 갔을 때였다. 탄현에서부터 봉화까지 내리 대 여섯 시간 동안 버스에서 누워 자고 있던 나는, 막내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군청에 도착해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자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막내 작가가 세상 어딨냐능. 생각해보면 나랑 일했던 언니들이 천사였다 흙;)
군청 무슨 무슨 과장님이셨던 고모부께서 등장, 버스 안에서 자고 있던 나를 친히 깨우셔서 인사하시고 저녁에 촬영을 마치면 어디 어디로 밥을 먹으러 오라 하셨더랬다. 그것도 촬영팀 모두를 데리고!!
그 날 촬영을 마치고 간 곳에는 우리 예쁜 막내 고모와 아침에 나를 깨워주신 고모부와, 태어나서 처음 본 송이버섯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아마도 자루째 실어나른 것 같다-
내가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내가 대 여섯 살 때쯤 포항 우리 집에 꽤 오랫동안 와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작고 하얀 얼굴에 웃는 것이 너무나 예쁜 고모, 외갓댁이 포항이라 자주 보던 선이 굵은 막내 이모나 청림의 이모와는 달리 오밀조밀 어여쁘게 생긴 막내 고모가 좋아서 꼭 붙어 손잡고 안기고 다녔던 기억만 있다.
고모가 결혼한 후에는 고모를 자주 볼 일이 없었다. 아빠는 근무지가 자주 바뀌는 군인이었던데다가 고모부는 봉화 사람이라 고모가 봉화로 시집을 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제대로 양반집 아들”이었던 고모부는 명절에 고모와 함께 할아버지를 찾아오시곤 했는데 우리 식구와 시간이 맞으면 고모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조카가 일하러 왔다고 함께 온 사람들 30 여명을 굳이 비싸고 귀한 송이 챙겨 먹여가며 (그것도 배 터질 만큼 말이다) 챙길 일인가 싶은 건 약 10년쯤 지나서 든 생각이고.... 그때는 어릴 때라 마냥 송이향과 맛이 신기하고 좋아서 헤헤거리며 받아먹기만 했다. 의례적인 말로 "감사합니다~"하고 하루도 아니고 이틀 저녁을 얻어먹었더랬다.
몇 해전 미스터트롯을 할 때 설운도 쌤을 만나서 그 때 기억하시냐, 우리 ‘좋은 세상 만들기’란 프로그램에서 한번 만났었다~ 송이 엄청 많이 먹은 거 기억하시냐 여쭈니 기억난다 하셨다. 그렇게 송이 많이 먹은 날이 없었다며. 그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더라니?!
나라는 인간이 본래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망각이 쉬운 년이라 그 후로 봉화까지 갈 일이 없고 경조사 아니면 고모부 뵐 일 없어 잊고 잊고 잊고 지내다가.... 아프시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뜬금없이 그 날이 생각나더라.
깡촌 시골까지 온 도시 조카에게 군청에서 일하는 고모부가 내어줄 수 있는 가장 큰 마음을 내어준 것이었는데, 스태프들에게 우리 조카 잘부탁한다.. 어쩌면 귀한 송이로 "뇌물"주신 것이었는데, 어렸던 나는 그 마음이 뭔지 몰랐고 정성도 귀함도 배려도 몰랐던 어리석은 년이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꼿꼿한 선비들이 많기로 유명한 봉화에, 그러한 가풍의 영향으로 사셨다던 고모부는, 병을 얻고 치료를 받으시다가 가망이 없다는 통보를 받으신 후, 그 옛날 선비들처럼 곡기를 끊고 스스로 마지막을 준비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가신 고모부께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