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윤주 Oct 28. 2022

파김치와 무릎 사이

아침밥 단상 - 아침에 드는 백만가지 생각

2022. 1. 31. 월요일. 설 연휴 첫 날


연휴 첫 날은 무슨? 그냥 월요일 아침밥!

설이니까 설날만 쉬면 되지 연휴가 뭐야??? 그거 먹는 거야, 입는 거야? 프리랜서 인생에 연휴 꼬박 꼬박 챙겨가며 사는 게 어딨니? (주절 주절 혼잣말, 구시렁 구시렁 블라 블라~)

부모님, 동생집 걸어서 15분, 나같은 애한테 나라에서 앞뒤로 쉬는 날 만들어 줘봐야 딱히 소용없다고라. 

그래서 출근한다! 회의한다! (버럭)

내일은 떡국 먹어야지. 


그래도 설 연휴니까, 밥은 새로 짓기! 냄비밥! ^^     


냄비밥 느무 맛있어!



지난 금요일, 첫 촬영 하던 날, 밥차 어머님께 파김치와 배추김치를 얻어왔다. 밥차 김치맛을 보니 이것은 공장 김치가 아니여! 직접 담으신 김치여! 느무 맛나! 이것이 그 유명한 1박 2일 밥차 어머님 솜씨렸다?!


"어머님~~ 김치 좀 싸주실 수 있어요?"


촬영 첫 날이라 이래 저래 일정과 동선이 꼬여 스텝들이 밥 시간을 놓쳤더랬다. 때문에 준비해 놓은 음식이 많이 남았다는 FD의 얘기를 듣고 부러 일정이 끝나고도 밥 먹으러 갔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음식 준비했다가 남는 그 속상한 마음을 안다. 게다가 1월 말, 춥기도 추운 겨울에 야외에서 150명 가까이 되는 스텝들 먹이려고 낮부터 오랜 시간 준비한 저녁밥이었는데.. 힘들다고 그냥 갈 수 없었다.


파란 그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난 후, 남은 것들 중 뭐라도 싸들고 와야 했다. 밥차 어머님은 배추김치를 몇 포기 넣으시다가 “파김치도 좀 줄까?” 하셨다. 엄훠~ 주시면 넘나 감사하죠! 어머님이 싸주신 김치가 한 보따리였다. 사실 한 손에 들지 못할 정도로 많았고 집에 와서 통에 넣으니 배추 김치는 김치통 한 통 가득, 파김치는 반통이었다. 정말 손도 크셔.


이걸 집까지 어떻게 들고 간대??


음주가무에 일가견이 있던 2, 30대 시절, 운전 면허 따면 차 살 게 뻔하고, 나란 년 차 사서 음주운전 할 것이 101%라고 예측하여 현재까지 면허 시험장 근처에도 가지 않은 터라, 나는 차가 없다. (하지만 올해 목표는 운전 면허를 따는 것이다. 헴!) 그래서 일단 촬영장에서 회사까지는 배차타고 어떻게 가보겠지만 (물론 그것도 배차 기장님께 양해를 구해야겠지만 – 김치 냄새 날 수 있으니) 회사에서 집까지는 택시로 우째... ;;;;;


아몰랑! 어떻게 되겠지! 


애초에 김치를 싸달라는 것은 음식 남는 것이 속상하실 법한 밥차 어머님의 마음을 다독일 심산이었으니 그 다음은 뭐, 진심이 통한다~ 뭐 그런 걸로 하자고~!

배차를 탔다. 기장님께 "김치 냄새가 좀 나도 이해해 주셔요~"했더니 되려 웃으셨었다. 내가 이 김치를 왜 들고 온 줄 알고 계셨고 기장님도 그게 나름의 배려.라는 걸 아니까. 괜히 감사했다. 또 괜한 나의 염려가 민망했다. 아, 하지만 다음 관문, 택시가 있다니...?

택시 기사님께 “제가 김치를 좀 들고 있어요. 김치 냄새가 나도 이해 좀 해주셔요~” 했더니, “괜찮아요~!” 하신다. 또 감사했다. 어쩌면 별 게 아닐 수 있는데.. 별 것이 아닌 것에 배려를 느끼고 심장이 몰랑 몰랑해졌다.


첫 촬영을 앞두고 스트레스가 많아 몸도 안 좋고 한 동안 날카로왔다. 다들 잘해보자고 한 말들이 가시가 되어 박히고 꽁꽁 처 멘 마음이 너무 차가워 화가 됐다. 어차피 사람들 모여 하는 일, "김치 싸주세요" 한 마디에 친해지고 속상한 마음도 풀리는데, 꿍~하고 가시 돋힌 말들 보다 마음에 없어도 응원하고 격려하면 되려 덜 민망해 지겠지.


내 무릎은 자존심이 없다. 

프리랜서 무릎 따위, 자존심은 개나 줘야지. 상황 상 내가 잘못하지 않았어도 무릎 꿇고 잘해보자.고 말할 수 있어야 어른이다. 벌써 47세나 됐다니?! 어휴! 나이 똥구멍으로 먹는 거 아니니까 남들이야 어쩌든 말든, 그러든 말든, 나이도 잘 먹고 소화 시켜야 하는 지천명으로 향하는 나이 아니냐? 까짓, 무릎 꿇는 게 뭐 어때? 


오늘은 그런 날이다. 

오늘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게 없지만 무릎을 꿇어야 하는 날.

괜찮다. 

나는 적어도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지 않을테니까. 

그게 자존심이니까. 


무릎 꿇기 위한 파김치 밥상







작가의 이전글 먹을 福 있는 자의 돔베기와 피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