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승주 Jan 13. 2024

인간과 인간이 해야 하는 일

베타 블로커

약물 오남용이 사회의 큰 문제다. 경각심 없이 위험한 약물을 처방해 주는 의사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의사라는 직종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하지만 또 환자가 작정하고 속이려고 했다면 무슨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엄격하게 처방하도록 규제를 강화하면 잘못된 사람 한 명을 없애고자 정말 힘든 사람 열 명을 놓치게 되는 것을.


베타 블로커라는 약이 있다. 원래는 협심증이나 고혈압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무대공포증을 완화하기 위해 소량의 용량으로 복용하기도 하는 약이다. 나를 포함한 의과대학 동기들은 의과대학 면접이나 의사 국가고시처럼 중요한 시험 때 그 약을 복용하곤 했다. 그렇게 한다고 못 볼 면접이나 시험을 잘 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긴장하여 목소리가 떨리고 당황하는 상황은 모면할 수 있다.


창업 초기, 중요한 투자 발표가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나는 약의 도움을 받아볼 요량으로 회사 근처에 있는 한 가정의학과에 방문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병원의 직원이 나에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방문하게 되셨어요?"

나는 잠시 방문이 막혔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사회불안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그런 문제였으면 정신건강의학과를 갔겠지. 그렇다고 '중요한 발표가 있어서요'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고민하던 나는 말했다.

   "아, 중요한 발표가 있는데요. 그때 필요한 베타 블로커가 필요해서요..."

   "네? 무슨 약이요?"

베타 블로커를 알아듣지 못한 것을 보면 간호사 선생님은 아닌 듯 했다. 난처했다. 마침 뉴스에서 약물 오남용에 대한 언급이 많던지라 나도 신경이 쓰였다. 대뜸 '약을 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원분은 경계 태세로 전환한 것 같았다. 나는 덧붙였다.

   "아... 그 베타 블로커라고 하는 약이 있는데요. 발표하거나 할 때 소량으로 복용하기도 하는데, 그 약을 처방받고 싶어서요."

   "아, 저희는 그런 거 안 해요."


순간 화가 났다. 가정의학과가 아니면 대체 어디서 그러한 문제를 상의할 수 있다는 것인가. 조심하는 것은 이해하나 환자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행정을 보는 직원이 알아서 판단해버리니 기분이 나빴다. 나는 최대한 화를 억누르고 공손히 말했다. 치사하지만 권위도 활용했다.

   "선생님, 저는 의사인데요. 가끔씩 발표할 때 드는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해서 약을 처방하기도 해요. 이전에도 복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진료 받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안 된다고 하면 그렇게 알겠습니다. 다만 말씀드려보면 그렇진 않을 거예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직원분은 진료실로 들어갔고 곧이어 의사 선생님이 나왔다.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고, 나는 직원분께 설명했던 것을 그대로 말했다. 선생님은 곧바로 이해하고, "아~ 들어오세요"라며 나를 진료실로 불렀다.


진료실로 들어간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발표는 어떤 발표인지. 중간에 어쩔 수 없이 나는 의사라는 것을 밝혔고, 선생님은 더 반갑게 맞이하며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설명했고, 선생님은 매우 흥미롭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곤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야. 재밌겠네요. 그래. 그러면 베타 블로커는 얼마나 필요해요?"

   "이전에도 복용했던 적이 있어서요. 10mg로 한 알이면 되어 최소 용량으로 주셔도 괜찮습니다."

병원 직원분의 경계에 내심 눈치도 보였던 나는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런데 선생님의 반응은 달랐다.

   "아니에요. 투자 받고 발표하려면 그런 자리가 제법 많지 않아요? 중요한 시기일 텐데 그래도 처음에 잘해야죠. 제가 약은 충분히 줄게요. 긴장될 때 있으면 한 시간 전에 복용하고 발표해요. 또 여유분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마음이 놓이기도 하거든요. '긴장하면 약 먹으면 되지 ' 이렇게 말이죠."

그렇게 선생님은 내게 제법 많은 양의 약을 처방해주셨다. 계산을 마친 후 나가려고 할 때 선생님이 다시 한 번 나와 나를 배웅했다.

   "사업 이야기가 참 재밌었는데 환자분들이 있어가지고 이야기를 길게 못 했네요. 그래요. 힘내고 또 필요하면 종종 들려요."


과거에는 의사가 동네의 주치의이자 '어른'으로 역할했을 때가 있었다. 환자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라는지 잘 알고, 각 집안의 역사를 이해하고, 처한 상황을 이해하며 그들이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지 도와주던 사람. 아픈 사람을 찾아 왕진을 가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중세시대에도, 근현대시대에도 의사는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환자는 자연스럽게 의사에 존경을 표하곤 했다. 굳이 권위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나를 진료했던 할아버지 선생님은 여전히 수기로 작성하는 차트를 이용하고 있었다. 나의 사업에 대한 자잘한 이야기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의대를 졸업했고, 사업을 하고 있고, 불안장애가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어 베타 블로커를 복용했던 적이 있고. 그렇게 나를 잘 이해한 선생님은 자신있게 나에게 수십 알의 약을 처방했다. 여유분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될 거라는 기가 막힌 처방을 하기도 했다.


언택트 시대에 이어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지금이지만, 나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음'의 중요성을 느낀다. 인류는 메타버스 속에서 살아가진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에게 종속된 노예로 남지도 않을 것이다. 기술은 인간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켜주겠지만, 우리는 그로 인해 인간과 인간이 해야 하는 일에 훨씬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의학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다 해낸다는 이 세상에서, 나는 다시금 환자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환자를 찾아가고, 각자가 원하는 형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의료 시스템을 꿈꾼다.


인간의 역할이 재정의되고, 그들이 더 잘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것. 나는 그것이 다가올 시대의 진정한 기술 혁신이라고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