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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펠 Jun 26. 2024

서책지구

지하철에서 내려서 처음 마주친 느낌은 '여기에 서책 지구라는 게 있는 게 맞나?' 하는 것이었다. 책으로 유명한 거리 근처는 다들 고지식해 보이는 사람들 아니면 중절모를 쓴 노인 분들 있을 법했는데 그런 것은 고사하고 책 한 권 손에 든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다들 서울의 일반적인 거리처럼 산뜻한 봄옷으로 치장했다. 벚꽃이 흩날리는, 그냥 여느 서울의 봄날이었다. 파란색 버스가 지나가자 두어 명이 버스를 따라 뛰었다. 분명히 가까운 곳에 중앙차로가 아닌 정류장이 있는 것이다. 지하철역 출구 근처에는 중앙차로보다는 곧장 환승할 수 있 길 정류장이 더 편했다. 버스중앙차로 근처에 지하철역이 있으면 버스정류장에도 지하철 출구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순식간에 엘리베이터니 에스컬레이터니 하는 민원이 쏟아질 것이 생각났다. 결국 계단은 한 명이 다리 아프고 주저앉으면 앞뒤로 아무도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상태가 될 정도로 좁만들어질 것이고 엘리베이터는 오히려 휠체어를 탄 사람은 한 시간은 기다려야 탈 수 있을 지경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기가 따뜻해지자 생각들도 가벼워져서 이리저리 자유자재로 둔갑해 가며 가지를 뻗었다. 나중에는 어떻게 해서 이런 생각으로 넘어왔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는데, 신기하게도 발걸음은 알아서 서책지구 쪽을 향하고 있었다. 네이버 지도에서 미리 봐 두었던, 추어탕 집 옆 코너의 GS25를 끼고 우회전을 했다. 삼 층짜리 벽돌 건물과 1층의 슈퍼마켓이 눈에 띄었다. 바로 앞에 편의점이 있는데도 슈퍼마켓이 망하지 않은 것이 신기했지만 가까이 가자 노인들이 장기를 두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은 슈퍼마켓 주인인 듯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함께 장기를 구경하던 다른 할아버지가 '담배 하나만 줘 봐'라고 하자 두리번거리던 할아버지가 마치 고무공처럼 허리를 확 펴면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다시 느릿느릿 계산대로 가서 담배를 가지고 왔다. "오천 원이야. 이따가 줘, 적어놨으니께."
옛날에는 이런 광경을 부동산에서나 보곤 했는데 요즘은 부동산도 사무실처럼 생겨서 바둑을 두거나 야구를 틀어 놓고 부채질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여기 서책 지구가 진정으로 시작되는 경계가 아닌가. 종이책이 아직까지 전자책을 힘껏 밀어내고 있는 중심축웠다.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막다른 골목이 나오면 바로 왼쪽으로 돌자마자 서책 지구가 시작된다. 서책지구가 시작되는 곳에는 마치 옛날 마을 입구마다 장승 세워 놓았듯이, 노린 건지 우연히 그곳이 버티어 남은 것인지 장승 문고라는 책 대여점이 있다고 했다. 요즘 도서관에서도 전자책을 빌려주는데 책 대여점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싶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어차피 책 대여점이라고 이름은 돼 있지만 돈을 내도 동네 사람이 아니면 책은 빌려 주지 않고 주 업종도 카페라고 한다. 혹시 방향이 맞는지 확인할 겸 다시 핸드폰을 켜서 네이버 지도를 실행시켰다. 방향은 맞고, 지금이 열한 시니까 조금만 돌아다니다가 분식집이라도 찾으면 그때 가서 떡볶이를 먹어야겠다. 이곳이 관광지처럼 사람이 몰리는 곳이라면 아마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얼른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일부러 아침 식사도 조금만 하고 나왔다. 막다른 골목이 저 앞에 보였다. 저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된다고 했는데 막다른 골목이 가까워지면서 무슨 사람들 싸우는 듯한 소리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큰 소리가 오른쪽에서 나는 것 같아 서둘러 걸어가서 2층 높이로 담장이 둘러져 있던 빨간 벽돌집 오른쪽을 보니 차 두 대가 가벼운 접촉사고를 낸 모양이었다. 보험사도 부른 것 같고 사진도 찍지 않고 그냥 있는 것으로 보아 기본적인 조치는 다 한 것 같은데 아직도 서로 누구 잘못인지를 가지고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골목에 사람이 많이 다니는데 주차금지구역으로 지정을 해서인지 일방통행이 아니었다.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 돌아보니 이삼 층짜리 건물들이 즐비했다. 약간 내리막으로 되어 있어서 내려다보이는 거리 중간중간에도 차들이 다니고 있었다. 책방거리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책방 구역이 맞겠다 싶었다. 1층은 대부분 매장처럼 개조를 했지만 모두 서점인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날이 맑아서인지 서점들이 모두 책 묶음들을 밖에 내놓은 듯 길가를 따라 수많은 책묶음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가게 앞에 책 묶음이 없는 곳은 서점이 아닌 다른 가게인 것이다. 네일숍을 지나 인터넷에서 보았던 장승 문고를 보았다. 옛날에 유행하던 책 대여점처럼 한쪽 벽이 모두 책이었다. 대여점치고는 책이 적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커피는 무조건 테이크아웃"이라고 카운터에 붙어 있고 기다리는 동안만 간신히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은, 테이블 없는 의자만 몇 개 놓여 있었다. 아마 이런 곳에서 테이블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면 누군가는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앉아 있겠지,라고 생각을 하며 일단 지나갔다. 바람이 훅 불었다. 벚꽃 향기와 약간 황사 때문인지 모래 냄새 같은 것에 섞여서 오래된 책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온 동네가 책이 테마라는 것에 호기심이 나서 와 보기는 했지만 고서를 뒤적거리거나 헌책방에 사냥을 하듯 들어가서 헤집는 성격은 아니다. 헌책방이라고 해도 결국 중에라도 읽을 것 같은 책을 보게 되는데, 그건 고파는 가격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나중에 비싼 값에 팔릴 만한 책이나 희귀해서 지금 꼭 가져야 한다고 생각되는 그런 책은 신기하기만 할 뿐, 꼭 내손에 들어와야 하는 이유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에 우연히 약속 시간에 너무 일찍 도착해서 근처 헌책방에 갔다가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도장이 찍혀 있는 책을 보고 신기해서 구입했던 적이 있다. 모두 한자와 일본어라서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조그마한 책이 이만 원이나 하는 걸 보고 호기심이 동했었다. 그럼에도 집안에서는 구석 어딘가에 꽂혀있다가 이사 가면서 사라져 버렸다. 내가 읽고 교감할 수 있는 책이 아니면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가치를 매길 능력이 안되면 욕심도 함부로 리면 안 된다는 게 내 평소 지론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헌책방의 향기가 공기에 가득하다는 것은 그냥 걷기만 해도 책은 원 없이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주었다. 책이 단순히 많이 쌓여 있는 모습이 보고 싶다면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 가겠지만, 이곳은 정말 누군가 펼쳐 보았던, 책이라는 물건에 감정을 이입했던 그 시간들이 뭉쳐져 있는 곳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장승을 지나 마을에 들어온 상태였다.
가게를 두세 개 지나는 동안 공기는 점점 더워졌다. 봄의 에너지가 넘치고 책 향기도 짙어지는 느낌이었다. 먼 곳에서 철로 된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간간이 쿵, 하고 들려왔다. 주택가를 개조한 덕분에 2,3층에 출입하기 위해선 대문으로 들어가 계단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카페거리를 걷듯 가벼운 마음으로 가게를 대여섯 개쯤 지났을 때 내 눈에 '진규다원'이라 간판이 눈에 띄었다. 찻주전자 모양의 그림과 함께 커다랗게 가게 이름을 새긴 나무 입간판이 서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입간판 옆에도 어김없이 책 더미가 쌓여 있었다. '찻집인데 책도 파는 건가?' 싶어 호기심에 가까이 가 보자 그곳은 찻집이 아니라 차에 대한 책을 모아놓은 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여기에 조그마한 서점이 모여 있다고 해서 대체 어떻게 유지가 되는 건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서로 최소한으로만 겹치게 각자의 관심사 중심으로 책방을 꾸려 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호기심에 가만히 진규다원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 면은 새 책, 나머지 세 면은 모두 헌 책이었고, 한쪽 벽 앞에는 테이블을 놓아서 계산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헌책은 꽂혀 있는 것도 있고 작은 탁자 위에 선반을 쌓고 거기에 꽂아 두기도 했는데, 아랍어, 일본어 등 다른 나라의 책들도 많이 있었다. 이 중 한두 권이야 차에 대한 책이 아니면 어떠랴 하는 생각으로 아랍어로 된 책을 꺼내 보았는데, 의외로 홍차에 대한 내용이었다. 중동이나 아시아 책은 차라는 주제에 가까워봐야 커피에 대한 책일 거라는 내 생각은 어김없이 무너졌고, 책의 세계는 정말 사람의 상상력을 뛰어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대 근처에는 12,000원에 판매하는, 주인이 직접 그림을 그려서 만든 책갈피가 있었는데, 모든 그림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그려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갈피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진규다원이라는 말을 타공으로 새긴 얇은 철판으로 된 액자 같은 형태의 책갈피가 있어서 그 안에 주인이 그린 그림을 넣는 식이었다. 주인이 그리다 만 그림과 함께 가는 초록색 네임펜이 책상 위를 구르고 있었다. 책상 앞에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는 책갈피들을 살펴보다가 다과상 위에 있는 약과를 보고 고양이가 입맛 다시고 있는 그림을 골랐다.
"혹시 이 고양이 모델이 된 고양이가 근처에 있나요?" 계산을 하면서 혹시 바닥에 빵처럼 붙어 있는 고양이가 주위에 싶어서 주인에게 물어보았지만 주인아주머니는 기운 빠진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비싼 책을 골랐다가 내려놓고 책갈피만 달랑 사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나온 몇 개의 서점도 특색이 있을 것 같아 다시 가 보았지만 그냥 작은 헌책방들이었다. 아마 헌책방에 들르러 온 사람들은 저 세 군데를 다 가 보겠지.
간간이 대문과 문 닫은 가게와 카페들 말고는 모두 서점이었고 혹시 내 관심사가 있는지 싶어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진규다원과 달리 간판만으로는 분야를 예상하기 어려웠다. 태권도에 대한 책만 모아 놓았던 민들레서점, 글쓰기에 대한 책을 모아놓은 집현전, 수묵화에 대한 책을 모아 놓은 화선서원 등은 그래도 간판에 그림이 함께 그려져 있어서 알아보기 쉬웠다. 하지만 입간판은커녕 간판도 없어서 들여다 보고서 서점인 알아볼 수 있는 곳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냥 잡다한 책들을 모아 놓은 헌책방이 중간중간 섞여 있어 한 분야만 다루는 서점이 갑자기 타나도 바로 알기 힘들었다.
이 골목은 중간에서 뚝 잘려서 정말 책거리라고 할 만한, 차 서너 대는 지나다닐 만한 폭의 넓은 길이 가로질러 지나간다. 그 거리가 처음 서책지구라는 곳이 생기기 전 서점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책방거리라는 이름을 달았던 곳이다. 나도 사실 그 거리를 보고 싶었던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진입로에 불과한 이런 좁은 골목에서차 이렇게 볼 게 많을 줄 생각도 못했다. 한 시간 넘게 줄을 서서 간신히 구경했던 도서박람회보다 더 알찬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데 어디선가 뭔가 막대기로 바닥을 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한동안 들리지 않다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는 그런 소리였다. 골목길을 빗자루로 쓸고 있는 아저씨도 있었기에, 그저 주택가를 지나가기 때문에 생기는, 하나의 이 거리의 내용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소리가 특이해서 결국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단, 그 소리가 나는 곳을 찾으러 간다기보다 지나가다가 그 소리가 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면 한 번 들여다보자는 생각에 가깝긴 했다.
사람이 거리에 좀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플들이 더운 날씨에도 팔짱을 걸고 걷기도 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씩 들고 마시면서 떠들며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저 앞으로 승용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차가 지나간다는 건 교차로가 있다는 거고 처음에 가려고 했던 거리가 가까워온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책방 거리가 나오더라도 네이버 지도를 보면 이 골목은 건너편에서도 상당하게 이어진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 보기에는 체력이 따라줄지 몰랐다. 박람회처럼 오늘이 아니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면 어떻게든 둘러보았겠지만, 이번주에 다 못 보면 다음 주에 또 올 수도 있고 무엇보다 단순히 이곳의 분위기가 어떤지 호기심 때문에 왔을 뿐 유명 관광지 가듯이 평생 한 번 올 거 열심히 돌아다니자는 생각으로 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점심만 어떻게 할지 결정하면 어디까지 구경할지는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한 가게는 장식이 거의 없던 다른 서점과 달리 책 보다 장식이 더 많았다. 벽에는 곡선이 그려진 커다란 캔버스가 걸려 있었고, 창문도 책이 펼쳐져 있는 모양의 테두리가 붙어 있었다. 간판도 없고 창문으로 들여다보았을 때 책은 별로 없고 그냥 책을 테마로 한 가게 같은 모양. 창문 구석에는 어린이들이 한글 공부를 할 때 쓸 것 같은 자음과 모음 모양의 도형모아서 글마을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붙여 놓았다. '글마을?'
이름은 굉장히 평범했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보통 구청이나 시청에서 추진하는 캠페인이 그런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딱히 굿즈를 판매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사람도 없었다. 굳이 가까이 갔다가 관심이 있는 것으로 오인받기 싫어서 그냥 걸어가면서 들여다보았는데, 그림 구석에 무슨 대학교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동아리 활동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따뜻해서인지 그다지 배가 고파오진 않았다. 일찍 식사를 하고 돌아다니다가 재미없다 싶으면 돌아가기로 했었지만 생각이 바뀌어 그냥 아무것도 먹지 말고 배고파올 때까지만 돌아다니기로 했다. 책방 거리 끝까지 가면 어차피 내가 나왔던 지하철역 출구를 찾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때 지하철역 근처에서 햄버거든 샌드위치든 먹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교차로 바로 앞에 빵집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책 모양의 빵이 있다는 광고지가 벽에 붙어 있었는데, 들여다보니 테이블도 여덟 개 있어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 책 때문에 오는 골목인데 웬만한 책방보다 빵집이 더 크니 말이다. 빵은 이제 굽기 시작하기 때문에 빵을 먹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했다. 다만, 샌드위치는 바로 나온다고 했다.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지만 한창 재미있어질 때 배고파서 기운이 없어지는 편보다는 지금 조금 충전을 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샌드위치와 따뜻한 라테를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건너편에는 가게가 들어오지 않은 단독주택이 있었다. 뭔가 움직이는 느낌이 드는데 뭔지 알 수 없어서 그 집을 계속 쳐다보다가 답을 찾았다. 3층 현관문 앞의 난간의 빈 공간에 강아지 한 마리가 코를 내놓고 있었다. 심심했는지 누워서 내다보다가 다시 다른 방향으로 누워서 내다보다가 옆 구멍으로 가서 다시 코를 내놓기도 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에는 익숙한지 쳐다보거나 짖지는 않았다. 심심해서 사람 구경이라도 할 만도 한데 낯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지나다녔는지 사람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벨이 울려서 일어나 커피를 받으러 가 보니 포스기 옆에 아까 보지 못한 쿠키가 있었다. 쿠키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는데, 네모난 책꽂이에 책이 빼곡히 꽂혀 있고 다섯 층으로 된 책꽂이 중 아래에서 두 번째 칸책이 적어서 가운데 오른쪽 부분 책이 쓰러지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책꽂이 쿠키는 초콜릿과 땅콩 두 가지가 있었는데, 땅콩은 견과류 때문인지 책꽂이 모양이 별로 예쁘지 않아서 초콜릿 쿠키만 추가 결제를 하고 테이블로 가지고 왔다.
테이블에 빵과 커피를 먹기 좋게 배치하고 쿠키 사진을 찍었다. 네이버 지도에서 현재 위치를 보니 '만년필과 밀가루'라고 되어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커피 사진, 쿠키 사진, 샌드위치 사진을 올리고 나서 만년필과 밀가루라고 헤시태그를 달아서 올렸다. 잘 올라갔는지 확인하고 헤시태그를 누르자 책꽂이 쿠키와 책빵이 잔뜩 나왔는데 책빵이 무척 특이했다. 두 가지 종류였는데, 하나는 동그란 카스텔라에 책을 펼친 모양의 도장을 찍은 것 같은 모이었고, 하나는 네모난 카스텔라를 반으로 잘라 책을 펼친 것처럼 책등 같은 모양의 빵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펼치고 글자 모양으로 초코시럽으로 줄을 죽죽 그어서 조금만 멀리서 보아도 책을 펼친 것처럼 생긴 것이었다. 사진들을 보니 아마도 이 빵만 먹어 보려고 오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포장도 되지 않고 하루에 30개밖에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다. 구경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한 번 들려 보자고 생각했다. 오늘은 특별히 휴가를 내고 온 '평일'이니까.
샌드위치는 맛이 있었다. 커피도 개인 카페는 가게마다 맛이 다르고 때로 너무 연한 집도 있기에 꺼렸는데, 여기는 빵이 중심이라 커피는 그냥 다수에 맞춰서 내리는 모양이었는지 내 입맛에 딱 맞는 진한 맛이었다. 샌드위치는 금방 다 먹어 치웠지만 인스타그램으로 이 근처 사진들을 보면서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그동안에도 내다볼 때마다 강아지는 다른 구멍에 코를 내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느라 다른 사람들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햇빛을 즐기고 있었는데 바로 뒤 테이블에 정장을 입은 남자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굳이 꾸민 것 같지 않으면서도 왠지 책을 보러 이 거리에 온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너무 크게 말을 한 게 아닌가 하고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서 목례를 하자 남자도 목례를 했다. 다시 앞으로 돌아보면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도, 여자도 30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남자의 말에 웃고 있던 여자 눈가의 주름이 눈에 띄었다.
남자와 여자는 조용조용하게 대화를 나누었지만 웃거나 대화가 열기를 띠면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서 내가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듣기 싫거나 시끄럽거나 한 건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것이 미안할 따름이었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쟁반에 빈 접시들을 담으면서도
"빵 더 드실래요?  여기 맛있죠?"
"아니, 여긴 맛은 있는데 모양이나 가격이 맛으로 먹으라고 파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더 드실 거예요?"
"더 드신다고 하면 먹을게요,라고 하면 배 안고프다고 하겠죠? 근데 제가 저는 더 먹을 건데 같이 드셔도 된다고 하면 바로 드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 벌써 저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계시는데요?"
아, 소개팅이었나 보다. 어쩐지 지나치게 화기애애하다 했다. 마지막에 나가면서도 깨가 떨어지는 듯한 대화를 했다. 나가서 내가 걸어오던 쪽으로 가는 걸 보니, 이제까지 책방 거리를 구경하고 빵을 먹으 왔거나, 그냥 걸으면서 목적지를 여기 빵을 먹는 걸로 생각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들이 나가자 빵집은 금세 다시 조용해졌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가벼운 재즈만 공간을 가득 채웠고 바람과 공기가 없는, 순수하게 유리창을 뚫고 내게 내리는 햇살은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었다.
마지막 커피를 한 입에 마무리하고 쟁반을 카운터에 가져다주고 나서 주섬주섬 가방을 메고 나왔다. 햇빛이 뜨거워서 재킷은 그냥 돌돌 말아서 가방에 넣었다. 거리에는 아까보다 사람이 조금 더 많아졌다. 시간이 열두 시 가 넘었는데, 아마 이 시간쯤 되면 식당마다 사람이 가득 차고 오히려 거리에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던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
빵집 앞이 바로 교차로였는데, 빵집에 들어갈 때는 몰랐던, 아까 그 탁탁거리는 소리의 정체를 알아내었다. 빵집 건너편에 '펜의 모험'이라는 펜 가게가 있었는데, 그 가게 앞에 놓인 테이블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느릿느릿 타자기를 치고 있었다. 타자기 옆에 놓인 독서대에 올려놓은 태블릿을 계속 흘끔거리는 것으로 보아 전자책이나 어떤 인터넷 문서를 베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체적으로 타자를 치는 소리가 고르게 들려왔지만, 스페이스로 보이는 키를 치는 소리 유독 컸다. 그리고 한 줄을 다 치자 땡, 하는 작은 종소리와 함께 아까 내가 들었던 것 같은 그런 덜컹, 탁,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종소리는 내가 그때 타자기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들은 것 같은 착각이 있던 걸까 싶을 정도로 소리가 작았다. 바람 따라 들려온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였다. 호기심에 차가 오는지 보고 길을 건너 펜 가게로 들어가 보았다. 가게는 제법 넓었는데, 펜촉, 펜대, 만년필 등이 한쪽에 진열되어 있었고, 편지지와 노트도 있었다. 보통 문구점에서 살 수 있는 제품은 별로 없었다. 타자기 리본도 진열되어 있었는데, 리본 진열장 위에는 사람들이 다 같은 생각을 하는지, '중고 타자기는 취급하지 않습니다(매입, 판매 안 함)'이라고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타자기나 워드프로세서에 한때 관심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컴퓨터를 가격 면에서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접었지만 사용하지 않더라도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게 로망이기는 했다. 그런데 마침 팔지 않는다니 내 자금관리 솜씨를 보았을 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실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그렇게 보여주고 그 안에서 팔았다면 아마도 50만 원이라도 사지 않았을까 싶다.
가게에서 갈색 펠리컨 잉크와 함께 굵은 캘리그래피용 펜촉과 금속 펜대를 골랐다. 그리고 펜글씨가 예쁘게 나온다는, 양피지 질감이라는 두꺼운 종이 편지지도 하나 샀다. 한쪽은 검정, 한쪽은 빨강의 노끈 손잡이가 달린 종이봉투에 넣어 주었는데 이곳에서는 쇼핑백에 가게의 상호가 없고 서가를 배경으로 서책지구의 로고인 타자기가 놓여 있는 책상 그림만 한쪽에 찍혀 있었다. 앞으로 뭘 더 살지 모른다는 예감에 쇼핑백은 조금 큰 것으로 달라고 했다. 나오면서 흘끔 보니 쇼핑백 손잡이의 검정, 빨강이 타자기 리본의 바로 그 검은색과 빨간색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뭔가 머리를 굴린 것 같은데 그게 누군가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즐기자는 의도가 보이는 그런 감의 매개체를 발견하는 것 말이다. 책방 거리에 나오자마자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쇼핑의 보가 터지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
책을 테마로 한 관광지구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역시나 책은 그냥 테마일 뿐이고 이제까지 책은 한 권도 구입하지 않 물건 벌써 몇 가지나 쇼핑백에 담겨 있었다. 펜글씨 용품과 책갈피, 쿠키까지. 구입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인터넷 서점이나 혹은 대형 서점을 방문했을 것이고, 이곳에서 만약 책을 구경하거나 구입하게 된다면, 우연히 내 관심을 끌어당기는 그런 책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아직까지 그 관심 분야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정하지도 않았고, 사실 이 거리 분위기가 궁금했던 것이지 굿즈를 구입할 것 역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구입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서책지구가 생성될 때 행정적으로 어떤 지원을 했고 어떻게 해서 서점들이 모여들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가 정리되어 있는 책이 있다면 아마도 '고려'해 볼 수는 있겠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거하게 축제 분위기라던가 테마 거리라거나 하는 방식으로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조용하고 일반적인 시장 거리 비슷한 분위기였다. 카페 거리도 이것보다는 시끌벅적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의외로 길이 넓었다. 서책지구는 골목도 차선만 없었지 차가 여유롭게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널찍널찍했고 서책지구를 가로지르는, 지금 내가 있는 책방거리는 중앙분리대가 듬성듬성 있는 왕복 4차선 도로여서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으면 건너편 가게를 방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기했던 것이 가로수 간격이 생각보다 넓은 것이었다. 한 블록에 두 그루 정도로 보이는 가로수 덕분에 건너편 서점이 더 잘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 가로수들이 매우 굵어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타자기 소리를 들으면서 반대쪽 내리막과 오르막을 천천히 둘러본 후 네이버 지도를 보고 내리막 쪽으로 길을 잡기로 했다. 사실, 원래 가려고 한 쪽은 오르막 쪽이었는데, 단순히 그쪽이 지하철 출구가 조금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도를 자세히 보니 내리막으로 가고 나면 다시 지하철 출구까지 가는 길에도 책과 관련된 가게들이 더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곳은 내가 알기로 서책지구에는 속하지 않았는데도 큰길 방향에서의 책방거리 초입이라서 그런 것 았다.
조금 더 내려가자 건너편에 스타벅스가 보였다. 아까 그 빵집도 그렇고 카페는 전부 저쪽에 있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다른 서점 뒤 좁은 골목 쪽에 조그마한 세탁소가 보였다. 일부러 들여다보려고 한 건 아니고, 쩌렁쩌렁 울리는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왔기 때문이었다.
"아니, 뭘 이런 걸? 잘 됐으면 서로서로  축하하고 축하받고만 하면 되지, 요새 누가 떡을 돌려? 아이고, 잘 먹을게. 여보, 이것 좀 봐요. 좋은 데로 새로 취직했다고 떡 가져왔대, 냄새 죽여줘요. 한번 드셔 봐."
안에서 남편 되는 분이 누군지 물어보았나 보다.
"아, 동물원 2층 아가씨. 진짜 맛있네. 요즘 떡은 다 달기만 하던데 이런 떡을 하는 데가 다 있네. 어서 드셔 봐요."
세탁소에서 하얀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단발의, 키가 작지도 않지만 말라서 더 커 보이는 아가씨가 나왔다. 다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자 안에서
"그래요, 잘 가요. 또 놀러 와, 진짜 잘 먹을게."
하는 소리가 났다. 아가씨는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가 나 않게 종종걸음으로 걸어서 타자기 치던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한 후 그 옆 대문으로 들어갔다. 대문이 닫힐 때 처컹, 하는 소리를 내면서 흔들렸다.
'저기가 동물원인가?'
아마 동물원 2층이라고 했으니 1층에는 동물원이고 그 건물 2층이어서 옆에 난 대문으로 들어가 계단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책방 거리에 동물원이라니 호기심이 생겨서 방향을 돌려 다시 살짝 더 걸어 올라가 보았다. 펜 가게 옆 건물은 가게로 개조하지 않은 단독주택이었고, 그 옆, 아까 그 아가씨가 들어간 대문을 지나 1층에는 '어흥'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었다. 유리창에는 깔끔하게 하얀색 네모가 쳐져 있고, '동물도감'이라고 쓰여 있었다. 종이에 깔끔하게 인쇄해서 붙인 '공룡책 있어요'라는 문구가 모든 것을 설명했다.
'동물에 관한 책을 파는 곳이라서 동물원이라고 했구나.'
공룡책도 있다고 하니 호기심에 다시 오르막길을 따라 걸어가서 가게에 들어가 보았다. 동물에 관한 책이 모여 있는 헌책방이었다. 헌책만 있는 건 아니고 새 책들도 있었는데 공룡책 있어요,라고 붙여 놓기에는 공룡책이 절반 정도나 차지하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뭔가를 하느라 계산대에서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성의 없이 둘러보던 내 눈에 가죽 장정으로 된 묵직한 정글동물도감이 눈에 띄었다. 케이스를 보니 적어도 90년대 이전에 발행된 책인 것 같은데 6만 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나는 동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분위기만 보고 나가려고 했다. 사실, '동물원'이래서 관심이 들었던 것뿐이니까. 그런데 한쪽 벽에 특이하고 똑같이 생긴 책들이 책꽂이 한 줄에 죽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동물원 입체북'이라는 제목인데 가격이 2만 5천 원이라고 되어 있었다. 꺼내 보니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열 때마다 동물들이 다물었던 입을 벌리거나 몸을 낮추고 앞뒤로 움직이거나 하는 모습이었다. 동물이 없는 배경에는 간략한 동물 설명이 있었다. 아마 애들 보는 입체북으로 만든 것 같았는데 배경이 왠지 이상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다 보니 실제 책방 거리를 사진으로 찍은 것이었다. 동물들이 바로 이 앞 책방거리 차들 사이에 섞여서 돌아다니는 것처럼 만든 입체북이었다. 여기도 나와 있나 싶어서 넘기다 보니 가운데쯤에, 코끼리가 코로 펜 가게의 타자기를 들어 올리는 장면이 들어 있었다. 오른쪽 구석에 '어흥' 간판이 달린 건물이 잘려 있었다. 재미있어서 끝까지 다 보고 여기서 구입하는 첫 책으로 삼기로 했다.
계산대로 가 보니 아주머니가 바쁘게 하던 그게 바로 이 책에 들어가는 입체 구조물들을 목공풀로 붙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거 직접 만드신 거예요?"
"네, 설계부터 모두 우리 남편이 한 거예요. 인쇄하고 자르는 건 저 위에 인쇄집에서 해줘요."
"책방거리 사진이 배경이던데 사진도 다 직접 찍으신 거예요?"
"사진 잘 나왔죠? 그 사진들은 이쪽 행사 있을 때마다 구청에서도 돈 주고 갖다 써요. 입체북은 의외로 잘 나가요. 그래서 우리 집이 '어흥'이라고 돼있는데 책제목 보고 동물원이라고 알고 찾으러 오시는 분들도 좀 있어요."
"저는 모르고 왔는데 이건 사가야겠어요."
나는 입체북을 내밀었다.
아주머니는 책을 능숙하게 펼치더니 '어흥'이라는 간판이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아까 타자기를 들고 있는 코끼리가 있는 페이지 오른쪽 끝에 이 가게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다음 페이지의 점프하는 사자 뒤에도 '어흥'이라는 간판이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책을 펴면서 사자가 갈기를 날리면서 뒷다리로 힘껏 점프를 해서 완전히 폈을 때 멋진 옆모습을 자랑하다가 다음 페이지로 넘기면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었는데, 사자 몸통에 가려져 있는 가게 유리창에 깔끔한 네모 안쪽에 '동물도감'이라는 말이 쓰여있지 않고 그냥 네모만 남아 있었다. 아마 사진을 찍고 나서 그 글자를 넣었던 모양이었다. 아주머니는 능숙한 솜씨로 구겨지지 않게 사자 몸통을 살짝 구부리고 그 네모 안에 순식간에 도장을 꾹 찍었다. 도장에는 '동물도감'이라는 글자가 유리창에 붙여 있는 모양대로, 하지만 조금 작게 쓰여 있었고, 그 옆에는 QR코드가 있었다. 그 아래에도 '어흥에서 직접구매'라고 더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아마 여기서 직접 사야 찍어주는 도장이라는 뜻인 것 같았다. 생각보다 훨씬 깔끔하고 의미 있는 기념품이 될 듯싶지만 다만, 여기서 말고 파는 곳은 없을 테니 원본 인증 같은 건 큰 의미는 없을 것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신기하게 생각하는 걸 알았는지 아주머니가 설명을 했다.
"처음에 이 책 구상할 때 하고 지금 하고 거리가 달라진 곳이 몇 군데 있어요. 그 가게들은 사진에서 지금하고 다른 곳에 이렇게 도장을 찍어줘요. 무슨 쿠폰 같은 건 아니고요, 그냥 기념스탬프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러면서 책갈피 같은 종이 하나를 주었다.
"여기 있는 가게들이 그 도장 찍어주는 곳이에요. 사실 사진 찍을 때 하고 다른 점이 없는 가게는 찍을 데가 없어서 처음엔 기 안 했는데, 넣어 달라고 해서 만든 게 몇 개 있어요."
그러고 보니 바로 옆 펜 가게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디에 찍을지 궁금해서 바로 가보기로 했다.
인사를 하고 나와서 바로 펜 가게에 들어가자 아저씨가 바로 알아보았다. 나온 지 몇 분 되지도 않았으니까. 쇼핑백에서 입체북을 꺼내자 바로 알아보고 계산기 옆에 있던 도장을 스탬프에 톡톡 찍었다. 그리고 도장을 어디에 찍나 했더니 코끼리가 있는 페이지를 능숙하게 펼치고는 타자기가 놓여 있던 테이블에 찍는 것이었다. 타자기가 그곳에 있었는데 코끼리가 들어 올렸다는 표시인 것처럼 타자기 모양으로 점선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주 작은 '펜의 모험'이라는 글자와 QR코드가 들어 있었다. 아마도 이 가게 홈페이지로 통하는 것 같았다. 책 페이지를 열었다 닫았다 해보니 타자기가 테이블에서 들어 올려지면서 그 자리가 깜빡거리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여기 사진들이 예전과 달라진 것들 사진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타자기가 없었나 봐요?"
"다들 물어보는데, 타자기를 놔두지는 않고, 아버님이 쓰실 때만 잠깐 가지고 나가셨다가 그만 쓰시거나 햇빛이 너무 강하면 다시 가지고 오시거든요. 책에 사람 얼굴이 나오는 건 좀 그래서 동물원 사장님이 센스 있게 아버님이 타자기 안칠 때 골라서 사진을 찍어 주신 거죠."
"아, 원래 달라진 게 없으면 도장 찍을 데가 없는데 그래도 찍어달라고 한 데가 있다고 해서요."
"몇 군데 없긴 한데 저 빵집일 거예요."
아저씨는 건너편 모서리를 가리키셨다. 거기는 아까 내가 책 카스텔라를 보고 감탄하며 커피를 마셨던 곳이었다.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은지 뭔가 새로 한다고만 하면 다 끼어들려고 해서 피곤해요. 그래도 저기가 좀 유명해지니까 사람도 많이 오긴 하는데, 저기가 책 가지고 뭔가 다 같이 좋아질 만한 걸 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동물원 책도 그래. 저 가게 입구는 골목에 있잖아요. 정면도 아닌데 굳이 도장을 넣겠다고. 여기 한번 봐봐요."
아저씨는 책 뒤쪽 몇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보면 동물들이 내리막 걸어가면서 이쪽 라인을 은 거야. 근데 굳이 자기들도 넣어야 한다고 해서 이쪽 라인 사진을 새로 찍었다고. 근데 그 사진 가지고도 마음에 드니, 안 드니 하면서 무슨. 그렇게 싫으면 지들이 만들어서 팔지."
페이지를 보니 순록이 걸어가는 그림이었다. 그냥 네 다리를 움직이면서 내리막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었는데, 간판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도장 찍는 곳이라는 글자를 매우 작게 써서 간판 안에 테두리를 쳐 놓았다.
"아니 여기 보이지, 이게 이 책이 다른 곳은 도장이 있으나 없으나 티가 안 나는데 이 집은 꼭 가서 도장을 안 찍으면 눈에 거슬리게 해 놨어. 봐봐 우리 집 타자기 테이블에 도장 안 찍으면 이상한가? 아니거든. 이 책에 나온 곳 다 그래. 근데 저 집만 지네집 도장 안 찍으면 만들다 만 책 사 간 것 같은 느낌 들게 만들었다고. 이것 때문에 동물원 부부도 엄청 싸웠는데 말이 안 통해."
한숨을 쉬는 아저씨 설명을 뒤로하고 한 바퀴 돌아보다가 먹지 한 권을 샀다. 혹시 나중에 리본이 단종되더라도 이 먹지가 있으면 타자기를 쓸 수 있다고 했다. 타자기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직접 치는 모습을 보니 뭔가 타자기와 관련 있는 물품에 마음이 조금 동했다.
가게에서 나와서 다시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가려다 길을 건넜다. 그러고 보니 그 빵집 도장을 안 찍으면 그 페이지가 너무 휑해서 나중에도 기분이 좀 그럴 것 같았다. 빵집에 들어가서 책을 내밀자 역시 익숙한 솜씨로 책장을 펼친다. 그리고 도장을 찍으려고 하는데 왼손으로 순록을 누르려고 하는 것이었다.
"아 그거 억지로 눌러 접히면 나중에 안 움직이지 않을까요?"
그러자 아르바이트생은 한숨을 푹 쉬면서 다시 다른 곳을 누르면서 도장을 찍었다. 도장은 통째로 검은색 바탕에 간판 글자만 흰색이 되도록 만들어 놓아서 도장을 찍자 도장을 찍어 달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생은 다 됐다고 말만 하고 다시 돌아가 커피머신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온 참이라 왜 같은 동네에서 다들 욕을 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방금 전에 먹은 음식 사진 말고도 카스텔라는 다음에라도 꼭 사진을 찍어서 올려 주고 싶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머리만 좋아서 뭐 하나,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가게를 나서서 다시 길을 건너려다 다시 돌아왔다. 화장실도 가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잔 더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가게는 도무지 가고 싶지 않아서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여전히 스타벅스에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잠깐 창가 쪽 빈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을 펴 놓고 영어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잠깐 스치듯 보면서 영어공부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았을 뿐인데 그 사람이 나를 쳐다보면서 눈이 마주쳤다. 민망해서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커피가 나오기 전에 화장실이나 다녀와야겠다 싶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생각보다 빈자리가 많이 있었다. 이 동네가 사람이 많을 때와 적을 때가 차이가 큰 것인지 원래 여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내다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화장실에 갔다가 나와서 바로 1층 카운터로 갔다. 영수증을 보여주면서
"이거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했는데 마시고 갈게요. 머그컵으로 바꿔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스타벅스입니다."
거리와 동떨어진 듯한, 갑자기 우리 동네로 돌아온 느낌. 어디서나 똑같은 서비스라서 체인점을 이용하는 거겠지.
잠시 카운터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다 커피가 나와서 들고 2층의 내가 봐 두었던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아 아까 사 왔던 쿠키를 꺼냈다. 쿠키를 한 입 베어 물고 다시 커피를 빨대로 쪽쪽 빨았다. 얼음물도 얼음물이지만 그 끝에 고소하면서도 쓴 맛이 주는 안도감이 있다. 햇빛이 건너편을 하얗게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건너편에도 중간중간 주차장으로 보이는 셔터와 대문들을 끼고 작은 서점들이 있었다. 그 한가운데 새빨간 글씨로 눈에 확 띄는 곳이 있었다.
'책을 만들어 드립니다.'
저런 곳이 있네. 겉으로 보이는 광경은 각종 천들이 두루마리로 세워져 있고 커다란 기계도 있어서 마치 인테리어 가게 같았다. 커피를 다 마시면 저기 먼저 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아래층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 목소리 같은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왠지 뾰족했지만 잠시 후 잦아들고는 더 이상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아 다시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자를 쓰고 나시티를 입은 남자가 강아지를 산시키고 있었다. 강아지는 몰티즈같이 보였는데, 연신 정신없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 특이한 것을 본 것처럼 건물 쪽으로 다가와서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어느새 다시 연석 쪽에 코를 킁킁거리듯 바닥에 바짝 대고 걷곤 했다. 하지만 주인을 당기면서 가는 것 같지는 않고 발걸음에 맞춰서 줄이 팽팽해지지 않는 선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 동네 사람인가 보다. 이런 데 살면 좋으려나?'
예전에 여의도에 사는 친구 하나가 6.3 빌딩 때문에 외지인이 많아서 살기는 별로라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여기도 관광지는 아니지만 단지 신기하다는 이유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지는 않을 테니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쿠키는 진작 다 먹었고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삼키고 얼음 두어 개를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건너편에나 가 보자, 하면서 컵을 반납 테이블에 넣고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깔깔거리던 그 목소리가 작게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주머니 셋이 웃으면서 계단 입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명이 커피 네 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문한 커피가 이제 나왔나 보다. 쟁반을 든 아주머니가 기다리는 것 같아 서둘러 내려갔는데 계단을 거의 다 내려오기도 전에 쟁반 든 아주머니가 뒤를 보고 이야기를 하며 올라오는 것이었다. 부딪힐 뻔한 것을 간신히 피하는데 그 아주머니가 쟁반 쪽은 보지도 않고 뒷사람에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이런 데 오는 사람들은 다 고상한 척하는 거잖아 호호호호호"
다른 아주머니들도 그 얘기를 듣고 깔깔거렸다. 딪힐 뻔한걸 간신히 피했더니 지들끼리 뭐가 웃기다는 건지.
밖으로 나와 다시 오르막을 걸어 횡단보도로 건너려는데 문득 아래로도 비슷한 거리에 신호등이 있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돌렸다. 내리막으로 가면 횡단보도는 꽤 멀어서 그냥 빵집 방향으로 걷는 게 나아 보였다. 그때, 스타벅스에서 옆옆 건물에 관광안내소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서책지구 관광안내소'
유리문으로 들여다보니 사람은 없었고 신문이나 잡지에서 스크랩한 기사들이 게시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밖에 안내지도라고 꽂아둔 것이 있기에 하나 집어 들었다. 두 번 접혀 있는 것을 펼치자 서점들이 듬성듬성 표시되어 있는 약도가 있었는데, 스타벅스조차 나와 있지 않아서 언제 업데이트한 건가 싶었다. 식당이라도 나와 있다면 참고할 텐데 네이버 지도가 훨씬 자세하게 나와 있는 편이었다. 관광안내소라고 쓰여 있기는 하지만 과연 관광상품이라고 생각은 하는 걸까 싶었다.
왠지 기분이 상당히 가라앉아서 동물원 입체북을 구입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걸 찾으러 다니지 말고 그냥 눈에 띄면 들어가 보고 특별히 눈에 띄는 게 없으면 전철역 쪽으로 걷자고 생각했다.
초록색 버스가 지나간다. 저 멀리 승용차가 달려오는데 노란불이 켜졌다. 승용차는 눈에 띄게 속도를 줄였고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사람들이 중앙선 정도까지 걷고 나서야 나도 발걸음을 옮겼다. 건너야 하는 건 알지만 건너편이 햇볕이 뜨거워 보였던 탓이다.
하지만 막상 건너보니 덥지는 않았다. 조금 빨리 걸으면 더울 것 같은 딱 그 정도의 봄날씨다. 뭔가 따스하면서 더운 듯하고 고양이가 아스팔트에 배 깔고 자기 좋을 것 같은 늘어지는 날씨. 하늘도 맑아서 온 세상이 빛나는 것 같지만 여름처럼 눈이 따가울 정도는 아닌, 말 그대로 봄이다. 지루하기는 하지만 걷기에도, 길을 걷다가 다리가 아프거나 재미있는 것이 없다는 이유로 길가에 걸터앉기에도 좋은 맑은 날.
간판에 '책을 만들어 드립니다.'라고 쓰여 있는 곳은 제본소였다. 길가에서도 본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유리에는 타자기 그림이 붙어 있고 그 아래에는 마음에 드는 책이나 블로그를 알려주면 책으로 만들어 준다고 쓰여 있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포스터는 색이 윗부분이 약간 노랗게 바래고 네 귀퉁이는 찢어지는 것을 몇 번이나 다시 붙인 것 같았다. 안에서는 아저씨가 기계에 붙어 뭔가를 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들어가 보았는데, 길게 늘어진 책상에는 책 만드는 과정을 귀엽게 메모지 같은 것에 인쇄해서 스탠드로 세워 놓았다.
"책 만들 거 있어요?"
아저씨는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뭔가를 터치 스크린에 입력하자 잠시 후 프레스처럼 기계가 내려왔다 올라갔다. 종이 뭉치를 자른 것 같았다. 잠시 후 다시 뒤돌아 본 아저씨는 뭔가 책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쩍 말라서 책과 관련된 장사를 한다기보다 말싸움에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웃으면서
"판매용으로 만드는 거 아니면 기존 책으로 만들어도 돼요."라고 말을 하는데 눈가 주름이 지자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약간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었던 것이다.
"책을 만든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궁금해서 들러봤어요."
아저씨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갑자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팸플릿을 가지고 왔다.
"한 번 읽어봐요. 우리 집 오래됐어요. 인쇄해서 와도 되고 여기서 인쇄해서 만드는 것도 되고 타자기로도 쳐 주기도 하고 그러는데 타자기로 치는 건 읽어보게 되니까 싫어하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보통 타자기로 치는 건 인터넷으로 커플들끼리 만든 노트 같은 걸 많이 하죠."
오, 신기하다. 팸플릿을 펴자 눈앞에 있는 컴퓨터와 인쇄기, 제본기가 있었다. 작업 순서가 아주 작은 글씨로 사진마다 깨알같이 붙어 있었다. 다음 장에는 타자기를 치는, 펜의 모험 앞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 사진이 있었다. 내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알아챘는지 아저씨가 웃었다.
"맞아요. 저기 펜샵 주인아저씨예요. 타자기로 치는 글은 그분이 쳐 주시죠. 타자기 글씨체로 인쇄하는 게 아니라 진짜 타자기 글씨예요. 이것 좀 봐요."
아저씨는 책상 위에 있던 새하얀 A4 용지를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반지의 제왕에서 세오덴 왕이 간달프를 알아보지 못하고 꾸짖는 장면이 쓰여 있었다. 타자기로 친 글씨답게 뒷면은 오돌토돌했다.
"와, 진짜 타자기로 친 종이는 처음 만져봐요. 타자기 하나 갖고는 싶었는데. 그럼 저기 펜 가게 사장님만 치시는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도 하기는 하는데 저분이 워낙 밖에서 많이 치시니까 유명하셔서 사진도 그분 사진으로 넣었고 어차피 알바같이 하시는 거긴 한데 익숙해지신 건지 한동안 일이 없으면 왜 일이 없냐고 와보고 그러시죠."
"그럼 그냥 한두 권 인쇄해서 제본하는 것도 돼요?"
"그렇긴 한데 어차피 권수가 적으면 비싼 건 어디나 마찬가지예요. 타자로 쳐주는 것 말곤 우리 집이 딱히 더 좋다 그런 건 없긴 해요. 블로그 같은 건 자동으로 다 해서 주는 집도 있는데 뭐."
"저 나중에 타자 칠 거 좀 가지고 올게요. 여기서 제일 신기하긴 하네요."
"그러세요, 그럼. 인터넷으로 신청도 돼요. 파일 보내고 결제하면. 직접 오셔도 되고."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뭔가 기계가 있는 곳에서 나와서인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굴에서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햇빛도 더 세진 것 같고. 혹시나 해서 아까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팸플릿을 펴 보았다. '책을 만들어 드립니다'는 못 본 것 같은데...
이 자리에 '책마을 제작소'가 있다고 되어 있었다. 아, 간판에 저렇게 써 놓았지만 상호는 책마을 제작소였나 보다. 바로 휴대폰으로 '책마을 제작소'를 검색해 보았다. 팸플릿에 있는 주소의 웹페이지가 맨 위에 나와 있었다. 왜 간판에 상호를 안 써 놓았지,라고 생각하며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왼쪽 상단에 조그맣게 타자기 글씨체로 상호가 쓰여 있었다. 워낙 '책을 만들어 드립니다.'라는 글자가 시원시원하고 빨갛게 쓰여 있어서 미처 보지 못했다. 아마도 그냥 수식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타자기로 쳐서 만든 책이라니 매력 있다. 그렇다면 타자기로 글을 쳐서 제본만 해 달라고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타자기 글씨체로 인쇄해서 제본해 달라고 해도 되겠다. 아니다, 그래도 타자기로 친 것처럼 보이면 촉감으로도 느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헌책방을 두 개나 지났다. 건축과 관련된 책들이 있는 곳이었는데 가게 앞에 한 눈에도 비싸 보이는 천연색의 건축 관련 책이 늘어져 있고 햇빛에 바래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인지 차양도 인도를 다 가리도록 쳐 놓았다. 한 군데는 건물들 모양에 대한 것을, 한 군데는 건물 설계에 대한 것을 모아 놓은 건가 싶었는데 어차피 앞에 내놓은 책들 표지만 보고 생각한 것뿐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깔끔한 풍경 사진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는데, 건축 관련한 잡지 사진들은 거의 다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게 벌써 이십 년 전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그 책들은 비쌌고, 나야 어차피 기분 전환을 위해 필요한 것뿐이라 인터넷만 보아도 되지만 그게 아니라 그걸 진지하게 연구하고 공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도 가끔 했었다. 건너편에 다른 헌책방이 하나 보였다. 옛날 신촌에 오거서라는 헌책방이 있었는데 신기하게 딱 비슷한 모양이었다. 밖에서 본 모양은 이곳에 있는 다른 헌책방과 비슷하지만 내부가 책으로 이루어진 골목 같았다. 문부터가 문의 폭대로 들어가려고 하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책들이 문 폭의 한 10% 정도를 비집고 나와 있었다. 문서들이 아니라 책들이 사람 키만큼 바닥에서부터 쌓여 있는데 쓰러지지 않으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문 옆의 유리로도 보이는 것은 책꽂이와 책들이었다. 안에 책이 꽂혀 있는 것이 보이는 게 아니라, 유리가 있어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책꽂이를 설치하고 거기에 책을 꽂은 것이다. 옛날에 저런 곳에서 보물 같은 책을 찾는 상상을 하곤 했다. 책 사냥꾼이라고 하던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든 듯한, 나에게는 보물 같지만 대부분 가치를 알아보지 않은 책이 마치 한밤중의 핸드폰 화면처럼 내 눈에만 확 뜨이는 그런 상상이었다. 물론 오늘은 돈을 쓰려고 온 건 아니었지만 한 권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말 살 만한 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책이면 원서일 텐데 내가 원서를 표지만 보고 대단한지 어떤지 알고 사게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럴 듯 한 책 한 권 사 와서 나중에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어느새 길을 건너서 책방 앞에 와 있었다.
'세민 헌책방'
다른 곳과는 달리 분야도 딱히 없는 것 같고 혹시 여기가 서책지구의 제대로 된 시작이 아닐까 싶었다. 이 헌책방과 여기서 건너편 조금 오르막을 올라간 위치의 인쇄소. 게다가 그 인쇄소 건너편이 관광안내소였으니 말이다.
'띠딩'
문이 열려 있었는데 들어가자 전자음이 울렸다. 뭔가 지나가면 울리게 되어 있는 건가 보다. 헌책방과 전자기기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데. 수동 타자기가 블루투스 연결이 된다는 말을 들을 때의 느낌이 이럴까 싶다. 책방은 내가 생각하던 바로 그 모양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유리벽을 따라 책꽂이가 있고 바로 뒤에도 책꽂이가 있어서 골목이 된다. 그렇게 책꽂이가 대여섯 개가 있어서 골목을 이루고 모든 골목은 마치 서양의 성에 있는 미로처럼 책의 숲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80년대의 어린이 백과사전, 나중에 나온 것 같은 두산백과사전이 규모 때문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백과사전은 몇 군데 없었던 것 같다. 아마 분야별로 나누어 보유하다 보니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여기저기에 소설들과 별자리 책들이 섞여 있었다. 사실 분류는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딱 봐도 세로 쓰기일 것 같은 책부터 얼마 나온 지 안된 것 같은 새 책까지 있었다. 구석 아래에 하드커버 책이 하나 눈에 띄었다. 얇지만 하드커버. 호기심에 꺼내 보니 어느 대학교 석사과정 논문이라고 되어 있다. 갑자기 호기심이 사라져서 다시 꽂아 넣었다. 타자기에 대한 책이 눈에 보였다. "typewriter"라는 말에 꺼내 들었는데 한 페이지에 하나씩 타자기 사진이 있고 설명이 붙어 있었다.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한데 영어라... 다시 잘 꽂아 넣었다.
벌써 시간이 한시 반이 넘었다. 실내가 책이 많아서 그런지 약간 찌는 듯한 기분 땀이 났다. 정말 보물을 찾으러 온 것도 아닌데 시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도 그동안 뭔가 건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들었지만 아니었다. 처음부터 여기에 오려고 했다면 뭔가를 반드시 구입해 가겠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뒤적거릴 수도 있었을 것 같긴 하다.
계속 빵과 커피만 들어서인지 속이 약간 쓰리다. 꼭 굶은 것 같은 느낌. 김밥천국이나 나오면 점심을 때워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갔다. 서책지구는 이걸로 됐다. 책을 타자로 치고, 책을 엮고, 한쪽에서는 온 세상에 흩어졌던 책을 모아들이고, 이 세 가지를 다 하는 곳이라면 일부러 관광지라고 도움을 주는 척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살아남지 않을까? 거기에 굿즈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으니 더더욱 전망이 밝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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