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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펠 Jun 08. 2024

이탈리아 로마, 유럽, 세계

마침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시간이 찾아왔다. 전 세계의 흐름이 완전히 새롭게 정의되는 시간이었다.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시점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던 대상으로 인해 인류 역사의 한 축이었던 유럽이 더 이상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사실, 세계 어느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그곳에서 살아간다는 자부심이라던가 기분이 좋게 되는 데에만 해당되는 것일 뿐 사람이 그날그날 의식주를 해결하고 사람 사이의 고민으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을 보내고 남과의 다툼으로 내가 잘못한 게 맞냐고 주위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조금 더 맛있는 집에 갔어야 했는데 남들의 평만 듣고 왔다가 의외로 입맛만 버렸다고 투덜거리거나 세금을 깎아준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지거나 하는,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해도 '사람의 삶의 질을 넘어서는 삶의 질을 가졌다'라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렇지만 외국인 관광객을 볼 때마다 전 세계에서 와 보고 싶어 하고 본받고자 노력하는 세상의 중심이라는 상징이 주는 혜택을 받고 있다는 좋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날의 발표는 그들 모두에게 삶의 모든 곳이 공격받은 것 같은 상처와 충격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크리스틴은 최초의 그러한 조짐이 보이는 방송이 나올 때 부엌에 있었다. 그때까지는 성당에서 아무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매주 한 번씩 미사에 참여했고, 성경을 읽어주는 것을 듣고, 신부가 하는 말을 듣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내고, 빵을 받아먹고, 마지막으로 신부가 하는 말을 듣고 집에 오는 평범한 일요일의 아침을 보내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부터 교황청에서는 계속해서 공의회를 열고 있었고, 이제 곧 마무리 단계라고는 했지만 백 년 전 바티칸 공의회 같은 수준의 충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만 있었을 뿐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논의를 한다는 건 주위의 반응을 볼 필요가 있어서였을 수도 있고 반론이나 반대 세력 같은 요인들이 있어서 오래 걸린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이, 단지 일주일에 한 번 성당에 가는 사람들이 일일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마치 프로파간다처럼 적극적으로 알리려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밀값이 많이 내렸다. 이제 곧 빵값도 내려갈 것이다. 빵값이 내려가지만 집에서도 밀값이 많이 내려가면 밀가루로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빵도 늘어나서 사방에서 빵으로 잔치가 열리는 것 같다. 빵잔치가 열리려는 것을 보니 그래도 한 달이 넘게 기다려야 하지만 곧 크리스마스가 올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눈앞이라는 것을 간헐적인 폭설이 마치 얼룩처럼 이탈리아 여기저기를 폭격하는 것으로 실감할 만한 때가 오면 판공성사를 하라는 말이 들려오겠지.
"엄마 이쪽으로 와봐"
딸아이가 부른다.
"잠깐 기다려, 오븐에 빵이 아직 있어서 지켜보고 있어야 해."
크리스틴은 오븐 유리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시간을 맞추기는 했지만 빵의 모양을 보고 있다가 때가 되면 재빨리 꺼내야 한다. 레시피 메모에 적어놓은 시간이 맞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재료나 순서 같은 것은 모두 제대로 적었는데 항상 시간만 잘못 적은 부분이 한두 군데씩 나온다.
"엄마, 뉴스에 성당 얘기가 나오는데 이상해."
"뭐가?"
"이번 크리스마스 때부터 신분증 없으면 판공성사 못 본대."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와서 보라고."
그때, 부풀어 있던 빵이 살며시 내려앉듯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고 그녀는 바로 오븐을 껐다. 그리고는 무슨 말인가 싶어 텔레비전 앞으로 갔다. 이제 저 상태로 10분 정도만 있으면 된다. 오븐의 불을 껐으니 조금 더 여유가 있을 수도 있다. 뉴스에서는 생방송으로 공의회 결과를 발표하고 있었다.
"아직 보고서가 작성되고 있지만 문구만 확정되지 않았을 뿐 내용을 공표해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모두 발표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앵커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가톨릭 신자여서 어리둥절해서 저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가톨릭 신자도 아니고 이런 분야에 관심도 없어서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마리, 언제부터 얘기해 주기 시작한 거야?"
"아까 좀 된 것 같은데 내용이 별로 없어서 계속 반복해서 말해주고 있어. 그냥 계속 보면 처음부터 내용을 다 알 수 있을 거야."
크리스틴이 딸에게 묻자 딸이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로 건성으로 대답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신학교 입학자격에서 성별항목 제거, 신자 신분확인제 도입.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도 신부가 될 수 있게 하겠다는? 옛날에는 그 전통을 바꿀 권한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크리스틴에게는 환영이나 반대의 의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남자 신부를 포함해서 사제직에 대해 왜 그것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부가 되는 것은 사명을 받는 것이고, 결혼도 하지 않고 그 사명을 따르다가 중간에 그만두게 되면 '낙오자' 같은 꼬리표를 달게 되는 그런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명을 받았다는 의식으로 인해 삶의 다른 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직업처럼 '하고 싶어서' 할 수 있게 한다고? 크리스틴의 생각에는 남성 사제 중에서도 자기의 것, 취미나 그 밖의 것들을 사제직보다 소중히 여겨서 미사보다 거기에 더 힘을 쏟는 것 같은 사람들은 사제직을 한낱 직업 중 하나로 떨어뜨리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니 일반 직업을 찾아보라고 쫓아내야 하는 것이 맞아 보였다. 여성 사제도 딱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만 신부가 하고 싶으면 할 수 있고 여자는 하고 싶어도 못하기 때문에'라는 이유에는 명확하게 반대였다. 그럼에도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모여서 내린 결론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표출해도 그다지 영향이 없을 것 같으면 힘들게 그 생각에 몰입하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뉴스에서 떠든 것과 달리 그 해 판공성사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 다른 때처럼 성사표를 받고 판공성사를 하면서 성사표를 냈다. 그뿐이었다. 성사표를 우편으로 받지 못한 사람은 신분증을 들고 성당으로 오라고 했다. 성당에서 신분증과 전산망의 주소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판공성사표를 정상적으로 받은 크리스틴에게는 아무 일이 없었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커다란 변화가 성당 안에서도 불어왔다. 수녀가 되겠다고 하던 여자아이 둘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신학교에 가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2월이 되자 신학교 안에 건물을 새로 짓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 해는 받지 않고 그다음 해부터는 여성 신입생을 받아 사제를 양성하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신학교에 가겠다는 아이가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지원 자격에 최소/최장 나이 제한만 있을 뿐 정확히 입학 신청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부모는 대학까지 나오고 나서도 수녀가 되겠다면 허락해 주겠다던 입장이었기 때문에, 신학교에 가기 위해 1년을 기도만 하고 보내겠다는 의견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가 어떻게 조용해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단, 일단 대학 진학을 하겠다고 한 것으로 듣기는 했다. 매사에 조용하던 아이였기에 그렇게 강경하게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는 했다.
크리스틴은 인터넷을 보다가 문득 지난 공의회에서 여성 사제를 어떻게 허용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 전의, 가톨릭은 여성 사제를 허용하지 못한다고 할 때의 논리도 '지금의 교회에서 전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였는데 다시 허용하게 되었을 때의 논리는 무엇인지 알고 싶어 졌던 것이었다. 공의회에서 발표한 '교회 민주화'는 생각보다 성당 여기저기서 마치 옛날 공산주의를 생각나게 하는 말들이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사상적인 '싸움'은 이미 철 지난 것이어서 그저 말 많은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할 수 있게 된 핑곗거리나 잘 찾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성명서에는 별 말이 없었고, 실제로는 선언서 형태의 긴, 책 한 권은 될 법한 양의 문서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크리스틴의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다. 정치 체계. 이것이 교회 민주화에 대한 것인가? 교회 민주화에 대한 부분에 양성 평등도 들어 있을까? 크리스틴의 눈에 일단 황제라는 말이 눈에 띄어서 읽어 보았다.

"교회는 세상의 정치 체계가 단순히 황제 제도에서 왕정으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변화해 왔다는 단순한 사실보다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보장하는 체제인지에 역점을 두고 저항하거나 지지해 왔으며, 또한 교회 안에서도 교회는 세상 밖의 교회가 아닌 세상의 교회이며 동시에 천국의 하느님 나라가 세속에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내려온 것인 만큼 눈에 보이는 형태도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세속의 제도 중 배울 만한 것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입해 왔다. 이는 국가 제도에서 전산망까지, 인력 구조에서 건축 양식까지 분야와 종류를 가리지 않으며 이는 교황청을 비롯한 교회의 모든 조직이 세상에서 고립된 보호구역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증언하고 있다."라고 시작되는 구절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한참 뒤에 보니 여성 사제에 대한 부분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여성 사제 허용 같은 직접적인 문구는 보이지 않았다. 

"교회는 지상의 천국이며 그 구성원 하나하나, 평신도에서 주교까지 각자 중요하고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지닌다. 또한 그 자격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의 인식을 기준으로 정해 왔으며, 또한 그 기준은 나라마다, 시대마다 알맞게 변화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세계의 역사와 함께 변화해 온 교회의 이러한 역사를 부정하고 특정 부분에 있어서만 일정 시기의 기준을 고수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에 대한 근거를 성전과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에 공의회는 대표적으로 성별에 의한 사제직 임명 기준 등에 대하여 지금 시대에 합당한 기준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데에 만장일치로 동의하며 구체적인 기준에 대한 논의를 촉구한다." 이 짤막한 구절 안에 여성 사제에 대한 수백 년의 싸움의 종결이 들어 있었다. 크리스틴은 그다지 크게 동요되지 않았다. 단순한 상식적인 선에서 나온 결론이었다는 점이 허탈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해당 페이지를 닫고 나오려는데, 문서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이 보였다. "교황제는 로마 황제의 치세에 황제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채택된 제도이며 로마 주교는 로마 주교로서의 해야 할 직분을 수행할 뿐이다. 전 세계 질서에서 민주주의가 인류의 복지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나 일부 세력이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 제도를 이용해서 자국의 이익을 꾀하려 한 시도가 매우 여러 번 있어 온 만큼 가톨릭의 교황제를 위시한 정치적 제도는 특정 세력의 개입에 대비할 수 있는 정도에 한해서 민주주의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 민주주의는 유럽의 전통이라고 할 수 없고 실제적인 구현은 대한민국의 사례가 유일한 바, 기본적인 선거제도 차원부터 시작하여 서두르지 않고 차례로 도입하여야 한다. 어디까지 선거제도를 도입할지, 전 신자 투표부터 대의원 투표에 해당하는 주교 투표에 이르기까지 중요도에 따른 분류 등은 추후 교회법을 개정하면서 공개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 신자 투표의 가능성이 있다면 외부 세력의 개입을 막기 위한 신자들의 신분, 특히 판공성사표의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에 역점을 두어야 하리라 예상된다. 또한 삼권분립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교회조직과 제도를 감안하여 '교회 민주주의'에 대해 새로운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크리스틴이 충격을 받은 곳은 '민주주의는 유럽의 전통이라고 할 수 없고' 이 부분이었다. 유럽에서 나온 것이 아니던가? 어째서 민주주의가 유럽의 전통이 아니라는 걸까? 아테네는? 대통령제, 공화제는 다 무엇인가? 누군가 이와 같은 반론을 하기라도 한 듯 주석이 달려 있었다.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주석의 설명은 이랬다. "유럽은 수많은 사상의 정제소여서 몇 세기에 걸쳐 계속해서 사상들이 생겨나고 몰락했다. 민주주의라는 개념도 그리하여 유럽에서 파생하였지만, 그 민주주의는 단지 귀족제를 대체할 수단으로써의 민주주의였고, 주인이 되는 민주'시민'의 범위는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그러나 유럽 이외의 세계에서는 이미 10세기경에 이론상으로나마 천민조차 시험에 합격하면 공무원이 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는 나라들이 있었으며 그런 나라에서는 겉으로는 왕정이기는 하나 왕족이 모든 것을 하지는 못하도록 균형을 잡는 정치 체제를 몇 세기 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그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걸까? 미국이나 영국, 이탈리아 등의 단어로 검색을 해 보았지만 특정 국가명이 들어간 곳은 대한민국이 유일했다.
우리 성당이 아니라도 어느 성당에서는 내년에 여성 신학생이 입학을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없을 수도 있다. 심지어 선언서에 나온 특별한 나라, 대한민국에서조차도 그런 일은 저항에 부딪힐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교황청 문서를 인터넷으로 읽을 수 있게 된 세상, 이런 세상도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흐름에 저항해서 깎여 나갈지, 흐름과 함께하지만 강과 바다 사이에서 버티고 서서 기름진 흙을 받아 건강한 토양으로 점점 넓어져 가는 삼각지를 이룰지의 선택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이것도 성령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천국의 교회이고 어디까지가 사람의 교회인 것일까? 천 년 뒤에 교회가 유지된다면, 그 교회 역시 천국의 지상 현현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을까?
머리가 복잡해져 온 것은 단순히 여성 사제직에 대한 반대를 몇 세기 만에 뒤집는 데에 일 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유럽에서는 가톨릭의 정치 체제가 어떻든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에서 전 세계로 눈을 돌려 보니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이 보인다는 그 말이, 더 이상 유럽은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틴은 인터넷 창을 닫고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변화는 꽤 오래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유럽이 기준일 때는 무엇이 일어나도 '우리'가 보기에 정상이 되면 거기서 멈추었다. 이제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기준이 되었고, 그 기준에 '우리'가 맞추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유럽은 세상의 변방이다,라고 전 세계에서 모인 추기경들이 더 이상 무엇으로도 뒤집을 수 없는 '문서'의 형태로 선언해 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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