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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펠 Jun 17. 2024

젠틀 매드니스 노트

주말을 뜻깊게 보내는 방법

'젠틀 매드니스'라는 책이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그 사람들이 단순히 책을 좋아 것은 아니다. 책이 좋아서 책을 사 모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희귀본의 역사에 영향을 미칠 만했던, 자신만의 도서관까지도 만들어 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 자체에 대한, 책을 쓴 사람과 그 책을 소유했던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으로 책의 내용보다 물리적인 책 자체를 소유하는 데 열중했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정말로 그 책들을 전부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워낙 영미권에서 나오는 책 이야기는 유럽 중심이라 유럽의 귀족들 중 시간이 남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겠다는 추측 정도만 있는 상태에서 그런 것까지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빠듯하게 살림을 이끌어 나가야 했던 몽테뉴 집안에서도 글을 계속해서 쓰던 몽테뉴를 보면 가능은 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글을 읽을 시간이 있는 것과 글을 실제로 읽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젠틀 매드니스는 역사책인 만큼 읽다 보면 여러 가지 참고 자료들이 있고 그중 실제 흑백으로 실제 인쇄되어 실려 있는 자료들이 대다수이지만 일부 인터넷 웹사이트 주소만 나와 있는 자료들도 많지 않 있었다. 저작권 문제로 원서에 실려 있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은데, 그것들을 모두 별도로 인쇄해서 집게로 집어 책꽂이에 나란히 꽂아 두었었다. 책들을 버리는 가운데에서도 그 종이뭉치는 젠틀 매드니스 옆에 딱 달라붙어서 잘 따라다녔고 언젠가 노트에 한 장 한 장 붙여서 종이 뭉치가 아니라 노트의 형태로 나란히 꽂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집게 때문에 양장본인 책 표지가 눌리는 것 같았기 때문에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했지만 섣불리 손을 대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세의 5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스캔본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의 70페이지나 오려 붙여야 했던 것이었다.
여름 같은 날씨에 외출을 한 후 등심 돈가스와 함께 생맥주 한 잔을 들이켜고 돌아와 마음먹고 책을 펼쳤다. 2021년에 1회 다 읽었다(회독이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한국어가 아닌 것 같아서이다.)고 메모가 적혀 있다. 훨씬 이전에 가지고 있었지만 다시 구입한 것이라는 메모도 적혀 있었다. 내가 읽으면서 여백에 메모를 남긴 몇 권 남지 않은 책이다. 휘리릭 페이지를 넘겨서 인쇄한 사진이 꽂혀 있는 페이지를 찾았다. 대여섯 장의 사진은 언급한 페이지에 꽂아 두었고, 여섯 장의 사진이 한 세트인 것과 50페이지가 넘는, 책의 스캔본을 프린트한 것만 별도로 집게에 집어 두었었다. 또, A4 기준으로 한 페이지에 네 장씩 들어가게 해서 노트에 붙이기 쉬운 크기로 출력해 놓은 것도 있어서 두 개씩 잘 잘라서 붙여야 했다.
예전에 메모에 관한 정민 교수님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나온, 고서에서 발견한 책 여백에 세필로 기록한 메모들의 사진이 내가 지금 책 여백에 메모를 하는 습관의 본보기가 되었다. 반드시 책의 본문보다 작은 크기로 글씨를 써야 하며, 본문과 다른 구조의 문단이어서 헷갈리는 일이 절대 없도록 하는 그런 원칙들이 모두 그 글과 사진들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또, 기억 속에서 마구 섞여 버렸는데, 메모에 관한 책은 나중에 구입해서 가지고 있다가 사라져 버렸지만, 그전에 문학동네 카페에 글을 올려 주신 적이 있어서 그것을 읽은 기억도 있다. 그 카페 글에서는 고서를 실제로 읽듯이 뒤적거리며 참고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이 나와 있었다. 실제로 읽듯이 뒤적거리는 방법이라는 것은 별 게 없기는 했다. 실제로 읽으면서 뒤적거릴 수 있도록 실제의 책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책으로 만들 수 있게 출력을 하더라도 매번 제본을 하는 것은 복잡하기 때문에, 한 페이지에 실제 책을 두 페이지씩 단면 인쇄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출력한 것을 모두 절반씩 접어 오른쪽 페이지 뒤에 다음 장의 왼쪽 페이지를 붙고 다음 쪽의 오른쪽 페이지 뒤에는 그다음 장의 왼쪽 페이지를 붙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각 장을 풀로 붙인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참고는 하되 사용하지는 않는다. 80페이지씩 모아서 '소책자' 형식으로 출력하면 스테이플러로 찍을 수 있게 출력해 주기 때문이다. 80페이지인 이유는, 80페이지를 소책자로 출력하면 종이가 스무 장이 나오는데, 스무 장이 넘어가면 스테이플러로 찍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소책자도, 풀로 만든 책도 아니다. 처음부터 풀로 모든 페이지를 붙일 노트를 마련했기 때문에 노트에 들어갈 만한 크기로 출력해 놓은 것을 잘라서 그냥 각 페이지에 한 장씩 풀로 붙어기만 하면 되었다. 처음에는 종이 한 장 한 장 가득 풀을 칠해서 붙였지만 어차피 가장자리는 떨어지기에 가운데만 풀칠을 잔뜩 칠해서 붙였더니 사십 분 정도 소요된 것 같다. 다시 노트를 처음부터 넘겨 보니 뿌듯하다. 내게는 젠틀 매드니스의 내용에 나오는 것 같은 서가는 있지도 않고 필요도 없다. 그저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삶에 영양분을 주고 있으니까. 몇십 억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해서 셰익스피어의 초판본을 구하러 다니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잃어버렸지만 예전에 이덕무 선생의 사소절을 고전 데이터베이스 웹사이트에서 모두 출력을 해서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다. 언젠가 그것을 다시 출력해서 제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덕무 선생의 글은 언제나 페소아의 책처럼 내 안에서 울리는 뭔가가 있다. 두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은 완전히 다르지만 나라는 인간 안에서는 같은 주파수로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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