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이 키보드 연습은 애국가로 시작한다. 이것은 일종의 리투얼이기도 하면서 키보드와 나, 둘 사이의 약속을 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리투얼인 이유는 매번 새로운 키보드를 구입하거나 받거나 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하는 일이기 때문이고, 약속을 정하는 일인 이유는 이러한 과정이 해당 키보드를 두드리는 속도나 세기를 결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키보드에 따라 조금만 빨리 치면 내부적인 소프트웨어나 메모리의 한계 때문인지 글자가 한두 개씩 모음이나 자음이 빠진 상태로 입력되기도 하고 시프트 키가 눌리지 않은 상태로 입력되기도 한다. 단순히 세게 치면 해결되는 키보드도 있다. 회로가 물리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타자기를 치듯이 두드려야 제대로 입력이 되는 것이다. 휴대용인데 두드려야 하면 장소를 가려야 한다는 뜻이므로 휴대용이라는 용도에는 한참 어긋나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요가 없는 건 아니다. 집에서 써도 되니까.
하지만 이 과정이 필요한 건 단순히 그런 지식이 쌓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키보드마다 이런저런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애국가를 4절까지 쓴다는 건 어느 정도 친해질, 또는 익숙해질 시간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키보드에 익숙해지기도 하지만 키보드가 나에게 익숙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특히 손으로 어떤 작업을 할 때는 우리가 하는 작업은 두 단계로 나뉜다. 하나는 머리에서 내리는 명령이다. 보통 이런 건 최종적인 동작을 의미한다. 이번 경우에는 글을 쓴다는 것, 키보드로 어떤 문장을 쓴다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 단계는 실제 몸에서 그 명령을 해석해서 손가락 하나하나를 제어하는 것을 뜻한다. 이 두 번째 단계는 컴퓨터에서는 드라이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해당 기기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고, 해당 기기 제조사에서 제공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운영체제의 구성요소이다. 운영체제가 알아듣지 못하면 동작하지 않는 것이다. 문장을 쓰는 것도 머릿속에서는 문장을 내려보내겠지만 실제로는 두 번째 단계에서 손가락(과 손가락을 통해 키보드를)을 직접 제어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실제로는 우리 몸에서 이루어지지만 드라이버처럼 운영체제에 속해 있으되 해당 기기와의 최초의 연결 접점이다. 그러니 키보드가 나에게 익숙해진다고 할 때, 실제로는 내가 물리적으로 키보드에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 단계 모두, 머리로 적응을 하고 몸으로 적응하는,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어차피 키보드는 물건일 뿐이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뇌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전자는 뇌가 기계에 다가가는 것이고, 후자는 기계가 '드라이버를 통해서' 뇌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정도 설명으로 내가 익숙해지기라고 부르는 이 작업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가 얼마나 전달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익숙해지는 건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나 자신에게도, 이 키보드를 계속 사용해도 되는지, 사용하게 되면 사용 요령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게 되고, 키보드에게도 사용 빈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할 테니까 말이다.
옛날 사람들이 문방사우를 모았듯이 나는 키보드를 모으게 된다. 싸구려 키보드라도, 비싼 키보드의 장점이라고 하는 그런 키감에는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지만 가지고 다니는 느낌이나 입력이 되는 순간의 타격감은 나에게 더 잘 맞는 키보드도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모두 그럭저럭 잘 쓰고 있으니 끝이 없어서 큰일이다.
안드로이드 최적화가 있어서 선택했더니 조금 전보다 매우 인식률이 좋아졌다. 스페이스를 누르면 조금 늦게 입력되던 것이 그대로 잘리는 현상도 줄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라고 쓰려고 했다면, '안녕ㅎ'까지 화면에 나왔을 때 나는 이미 '안녕하세요.'까지 입력해서 다음 스페이스를 누른다면 '안녕ㅎ 안녕하세요.'가 되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게 없어진 것이다. 최적화라고 쓰여 있어도 무시했는데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기능이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연습의 결과이니 받아들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