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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Dec 15. 2024

삶은 나에게 말을 거는가

내가 어릴 적,  자신에 대한 개념, 즉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 나 자신이 나의 몸에서 생겨난 존재라고 생각했다. 보통 종교적으로 영혼과 정신, 육체로 분리해서 설명하는 에 반박하기 위해 뇌는 단지 육체에 딸린 기관이고 정신 같은 것은 뇌의 화학작용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반대로 처음부터 나 자신이 뇌에 의해 생겨난 자의식이라고 느꼈 것이다. 수많은 기독교 또는 그 밖의 종교를 배경으로 생활하다가 그 종교들의 의무사항에 식상해서 그 탈출구로써 찾아낸 뇌의 육체적 기능이라는 설명과는 반대로 나는 처음에는 내 자의식이 육체의 일부로서의 정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야 감정이나 정신, 영혼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게 되고 나서 전율을 느꼈던 부류이다.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사실 내가 보기에는 없다. 어느 쪽이든 답(이나 돈)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똑같기 때문이다. 단,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 대해서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그건 마치 자기장 안에서 돌아다니면 전기가 생기는 것처럼 일정한 방향성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뭔가 거창한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주입식 교육을 받았다가 단지 육체 안에서 화학 물질, 즉 호르몬들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유물론의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반대로 나처럼 나 자신은 단지 육체를 잘 관리하기 위해서 고도로 발달한 지능으로 인해 우연히 갖게 된 자의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갖가지 우연들을 접하고 나면 그 기준이 우연한 지능이라는 점에서 그 기준을 벗어난 영혼이라던가 운명이라던가 하는 쪽으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생각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니, 이런 경우가 있어? 그럼 한 발짝 나아가서 그런 경우는 없으려나?' 하는 식으로 확장이 되기 때문이다. 1차적으로 이런 점에서 내가 가지게 된 생각은 이렇다. 영혼과 신의 의지 혹은 우주의 원리, 운명 등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개념은 무신론자든 유물론자든 비웃을 수 있는 부분이 수두룩하겠지만 그 와중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그런 개념에 소름이 끼치고 눈물을 흘리며 마치 그런 개념의 대리인처럼 된 사람들, 대표적으로 불교나 기독교의 초창기 광신도들은 오히려 처음에는 머리에 든 정신이라는 게 육체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던 엄청나게 꼰대스러운 사람이었다가 생각이 바뀌면서, 그러니까 말 그대로 고정관념이 깨지는 경험을 하면서 더더욱 큰 반작용으로 그렇게 된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내 관념(뇌가 발달해서 자의식이 생겼다는 의견)에 균열이 생긴 것을 깨달은 계기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집 계단 앞에서 물을 받아놓고 물놀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갑자기 계단 난간 위에 올라가서 서 보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던 기억은 난다. 평소에도 난간 끝이 편평한 네모 모양이라 그 위에 올라가서 뛰어내리고는 했는데, 그때도 갑자기 그 난간에서 물을 받아 놓은 다라 안으로 뛰어내리면서 물을 튀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위에 서 있던 시간은 한 3초도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올라가서 뛰어내릴 자세를 취하는 사이에 발에 묻어 있던 물에 미끄러져 넘어져 버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순식간에 시선이 공중에서 으로, 땅에서 하늘로 빙 돌아 버렸다. 그때는 어려서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워낙 짧았기 때문에 '이렇게 죽는 건가'라는 생각 자체를 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늘과 땅 사이를 빙 돌면서 잔상처럼 어지러웠던 시선이 고정되었을 때는 계단이 내 눈앞에 있긴 한데, 거꾸로 보이는 그런 상태였다. 난간이 1미터 정도 되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머리가 깨지던가 허리가 아작 나던가 할 것 같은데 당시에는 어디든 많이 아플 것 같다고 막연하게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프지 않으니 깜짝 놀랐던 것 같다. 그리고 계단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거꾸로 보여서 잠깐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정신은 곧 돌아왔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왼손으로 땅을 짚고 거꾸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물구나무서기를 못 한다. 그런데 그때 나는 벽도 아닌 계단 난간 기둥에 기대어 한 손으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상황을 깨닫고 손목이 아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나자 그제야 몸이 갸우뚱하면서 배 쪽으로 기울어져서 다리를 접어서 땅에 대고 엎드렸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바로 드는 생각은 '천사가 정말 있나?'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시간이 가면서 풍화되고 다듬어져서 새로운 '사상'이 되는 법이다. 첫 생각이 그대로 뿌리를 내리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나중에 점점 더 커져서 '운명'이라는 것이 되었다. 여기서 신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적어도 직접 들어갈 자리는 없다. 이건 창조주나 이런 개념이 아니라 섭리의 개념이다. 내 삶에 끼어드는 존재에 대한 개념인데, 내 삶에 끼어든다는 건 내 삶이라는 것이 일종의 선형적인 흐름이라는 뜻이고 그 흐름은 곧 운명인 셈이다. 이쯤 되면 그 존재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천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내 삶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라는 존재는 존재하고 있다. 그 존재 그대로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나는 있는 자이다'라고 했듯이 나 역시 그저 있을 뿐이다. 태어나기 전에 태어나고 싶어 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전에 무였는지 전부터 나라는 존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태어나고 나서 이 몸을 가진 상태에서 궁금해하기 시작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가 지금 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유조차 내게 삶이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도 내 삶이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것 또한 내 삶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인생이란, 나와 내 삶 사이의 대화라고 하겠다. 내 삶은 내 밖의 모든 세상과 나 사이의 시간의 깔때기이고 나는 그 깔때기를 통해서만 남과 세상과 시간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내 삶은 단순한 통로일 뿐만 아니라 때로 직접 나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인격체라고까지 생각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깔때기가 우주의 측면에서 나를 바라보면 쉬지 않고 오직 내 쪽에서만 바깥 세계를 보며 행동하고 판단하는 내게 할 말이 무척이나 많을 것 같기는 하다. 어쨌거나 나는 내 삶을 통해 양방향으로 소통을 해야 하고 내 삶은 그 소통의 과정에서 무언가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단순한 느낌이지만, 그래서 최대한 명확하게 표현한 것조차 이 정도에 불과하지만 분명히 공감할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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