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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Dec 27. 2024

페라스트에서 산책하며 글쓰기

몬테네그로

인구가 별로 되지 않는 몬테네그로라지만 이곳 페라스트는 더더욱 조그마한 마을이다. 16세기부터 요새화된 동네로 생겨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에 지은 성벽 같은 건물들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보다 더 커진 적은 없 것으로 보인다. 마을은 바닷가를 따라 길게 걸쳐져 있는데 그 긴 쪽으로 가로지르는 것조차 걸어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인도도 없는 한 차선짜리 해안도로변으로 카페와 식당들이 조금 있다. 아마 여름 성수기가 되면 시끌벅적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조용한 지금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를 즐기러 온다면 모를까 단지 휴식을 취하기에는 조용한 거리와 그 옆의 바다가 너무 가슴속에, 원래 자기 자리였던 양 부드럽게 박힌다.
이곳에는 해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모두 배를 대기에 알맞은 적당한 깊이에 돌을 붓고 그 위에 도로를 만들어 두었다. 여름에, 아주 덥다면 이 마을 바로 앞, 물이 무릎에서 허리까지 오는 깊이에서는 수영을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물론 지금은 어차피 물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해도 아무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지만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지금도 춥지만 않으면 발정도는 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닷물이 매우 투명하다. 그래도 이 동네가 성수기가 되어도 관광객만 지금보다 조금 많아진 정도이 지금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은 이유는 정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어서 산책하기 좋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과 계단들, 인도가 없어서 간혹 지나가는 자동차도 피하기 힘든 감이 없지 않은 커브가 많은 도로, 그리고 쉬지 않고 몸을 휘감는 바닷바람과 파도소리, 여섯 시간마다 정확하게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 기념품 가게는 두 개뿐이고 슈퍼마켓은 개이다. 우리 숙소에서 성당을 지나가면 있는 슈퍼마켓에서 아침식사용 빵과 맥주, 그리고 식수로 사용할 생수를 구입해 온다. 나머지 기념품 가게들은 가 보았지만 그다지 질 좋은 물건은 보지 못했고, 슈퍼도 그나마 우리 숙소가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가까워서인지 음료 종류만 비교해 보아도 가장 저렴한 편이다. 특이했던 것은 스쿨존 표시가 있는 곳을 찾았는데 아이들은 정말로 서너 명만 보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성수기에만 이곳에서 살고 평소에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나름 읍내 정도로 규모가 있는 코토르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철 장사라고 하지만 이곳 관광지에서나 한 철이지 실제로 여름 외에는 일 년 내내 놀겠다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인가 문방구도 하나 보지 못했다. 포드고리차에서도 혹시 문방구가 있는지 찾아보기는 했지만 정부청사 근처여서인지 학생들이 쓸만한 물건을 파는 곳은 보지 못했다. 우리 숙소 근처에서 돌아다니던 곳 반대쪽으로 조금만 가면 테라/루나 관련 판결로 갑자기 유명해진 헌법재판소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근처에서 사진이라도 찍을 걸 그랬다. 그쪽에는 문구점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한국에서 글감노트를 챙길까 했었는데 짐을 최소로 줄이는 과정에서 빠졌다. 휴대폰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실제로 와서 보니 분위기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휴대폰을 공공장소에서 꺼내는 것 자체가 잃어버릴 확률 천정부지로 올리는 일 같아서 종이뭉치라도 휴대폰 대신 메모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을 바꿔먹었을 때에는 이미 문방구도 하나 없고 기념품 가게에서는 정말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만들어서 돈을 받고 팔 생각을 했을까 싶은 수첩 비스무레한 것(물론 겉면에는 몬테네그로의 상징들 그림이 가득하기는 했지만)만 만 오천 원에 판매하고 있었고 그나마도 연필이고 뭐고 필기구는 판매하는 곳이 없서 구입해도 쓸 데가 없었다.
편, 반드시 글감노트가 필요했던 바쁜 서울과 달리 멍하게 자연을 쳐다보며 생각할 수 있는 곳에 왔으니 반드시 급하게 적어두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다. 그렇지만 글감노트를 사용하다가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떠올린 생각을 언제든지 잊어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없을 수가 없다. 한참 생각하던 것도 생각이 삼천포로 빠지고 나면 통째로 잊어버릴 수도 있다. 나중에 적어야겠다,라고 생각을 했다가 잊어버리면 그래도 뭔가 적으려고 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사실이라도 알 수 있겠지만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꺼번에 잊어버리고 나면 단지 망상에 빠져 시간을 버린 셈밖에 되지 않는다.
모험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심지어 메모까지도 다른 환경에 놓였으니 (강제로) 변화를 즐겨야겠다. 숙소에 있을 때는 생각을 간단히 적어두고 나중에 그 메모를 보며 글을 쓰던 원래의 방식 대 언제든 각이 떠오른 그 순간 그대로 책상에 앉아서 글을 써 내려가면 다. 밖에서 돌아다닐 때는 조금 답답하겠지만 그래도 평소에는 주말에야 간신히 할 수 있었던 '생각나면 바로 쓰기'를 일주일 내내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기회이다. 그런다고 글이 얼마나 늘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중요한 건 '얼마나'가 아니라 '그때그때' 다는 과 그것이 '지속된다'는 사실이고,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것은 '많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한다는 사실 자체이다. 결과야 어떻든 모든 순간 성장해 나가는 나 자신을 미리 보는 것 같아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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