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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다 Apr 20. 2022

생산과 소비 사이, 어딘가

강릉살이2_자본주의와 행복의 관계란?



회사생활을 하면 자본주의가 궁금해지게 됩니다. 그동안도 자본주의 속에서 숨 쉬고 밥 먹고 잠자고 살았는데, 그전까지는 몰랐던 돈이라는 것의 속성이 회사생활을 하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사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생산활동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회사를 다니는 게 아니라 아르바이트를 해도 돈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회사를 다니면 좀 더 적극적으로 어떤 것이 내게 돈을 만들어줄 수 있는가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리에 앉아 컴퓨터와 일하며 돈을 만드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생각해보게 되는 거죠. 내 재능을 속속들이 뒤져보고 그것을 현금화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도 생각해봅니다.     



자본주의를 뼈저리게 느꼈던 날이 있습니다. 저금통을 털어 무언가를 사려고 했는데 거기서 얼마가 모자란 상황입니다. 예를 들면 삼각김밥을 사먹으려고 했는데 100원이 모자란 겁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너무나도 참치마요삼각김밥이 먹고 싶습니다. 100원 더 저렴한 메뉴가 아니라 꼭 이 메뉴가 먹고 싶은데 카드도 없고 휴대폰결제 서비스도 되지 않습니다.     


편의점에 가서 100원만 깎아달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의 존심 문제가 불쑥 솟아오릅니다. 마음 좋은 주인은 100원을 깎아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결국 주인의 결정에 따라, 주인의 처분에 따라 내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주인이 동의하지 않는데도 100원을 덜 내고 삼각김밥을 가져오면 절도가 됩니다. 특히나 편의점은 모든 시스템이 전산화되어 있고, 결국 이 누군가 감당해야 하는 100원은 대기업 시스템과 관련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편의점에 있던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아르바이트생일 경우에는 본인이 100원을 감당할 것인가, 감당하지 않을까를 결정할 것입니다. 아르바이트하는 입장에서는 100원을 깎아달라고 말하는 사람의 인상에 따라, 그 당시의 마음상태에 따라 100원이라면 뭐,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0이 하나씩 붙기 시작하면서 그 정도의 선의는 베풀 수 있지 않을까 싶던 마음도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편의점에서 100원만 깎아달라 말하는 일도 잘 없지만요.  

   


예전에 포장마차 분식집 같은 데서는 1,000원어치 떡볶이를 사먹으려고 하는데 100원이 모자라다면 시도해볼 수 있었을 법한 흥정이라는 행위는 차츰 시스템이 전산화되고 거대해져갈수록 100원은커녕 10원마저도 맞지 않으면 용납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얼마를 깎아달라는 고객은 잘 오지 않는 편의점을 하는 게 분식점 보다 나은 걸까, 판매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은 왜일까요.     



100원이 없으니 100원만 깎아달라는 손님에게 100원은 자기 돈으로 채워넣으며 물건을 내주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이 자기 돈으로 채워넣어야 하는 돈이 1,000원이 되고 1,000,000원이 되는 순간, 그 0의 개수가 하나씩 더해짐에 따라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100원을 만들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가 싶기도 한데, 만약 내게 1천만원이 있다고 해도 당장 누군가에게 그 돈을 선뜻 내주기는 어렵습니다. 보통의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이 1천만원을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들여야 할 시간값이 저절로 떠오르며, 지금 이 1천만원을 내주는 일이 내가 들여왔던 그 시간과 바꿀 만큼 가치있는가 따져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돈은 시간과 연계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시간을 쏟아 돈을 만들어냅니다. 그걸 가치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을 투자해 얼마의 돈을 버는가는 모두 다를 수 있고, 그래서 내 시간과 네 시간이 같은 줄 아느냐는 그런 대사가 재수 없는 투로 드라마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우리의 급여가 다른 것을 보면, 또한 인재개발원에서 책정한 강연료 기준 같은 것을 보면 우리의 시간이 창출해낼 수 있는 돈은 다릅니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누군가 시간을 투여해 창출해낼 수 있는 돈만으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해선 안 되므로, 완벽하게 이 명제가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이렇게 시간을 투자해 번 돈을 다시 소비하며 삽니다. 햄버거를 사먹고, 버스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 위해 자전거를 사거나 자전거를 대여하는 일 모두 소비입니다. 제 휴대폰 창에는 소비만을 위한 앱이 이미 여러 개 깔려있습니다. 열한번째 스트리트부터 지랄비용은 여기서 쓰라는 의미인가 문득 생각해보게 되는 지마켓까지, 쿠팡, 티몬, 위메프 등 소셜커머스들도 촘촘합니다. 일부러 깔려고 계획한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 이것저것 비용을 비교해 소비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왠만한 앱은 다 깔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유통업체들은 자기네 플랫폼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소비자를 늘리는 것이 주 목적이므로 쿠폰을 주며 회원가입을 유도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귀차니즘과의 사투를 벌이던 때도 있었습니다. 회원가입을 할 것인가 1, 2천원을 더 지불할 것인가의 사투입니다. 예전에는 아이디와 암호를 외워야 하고 계속해서 내 정보를 공개한다는 꺼림칙함이 커 회원가입을 안 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휴대폰 기기도 점차 회원가입이 쉽도록 한 글자만 적어도 내 정보를 슥슥 다 기억해 적어주는 데다 어딘가에 팔렸다면 이미 예전에 정보는 다 팔렸겠구나 싶어 회원가입을 꺼려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앱에는 다 회원가입이 되어 있는 상태기도 하고요.   

 


게다가 네이버는 각각의 온라인몰에 가입하지 않아도 자기네 아이디 하나로 구매가 가능한 오픈마켓 시스템을 도입해 누구라도 쉽게 소비할 수 있도록, 회원가입 없이도 손가락질 몇 번에 구매가 가능하도록 세상은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시장에 가지 않아도, 마트에 가지 않아도, 백화점에 가지 않아도,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상품은 내게로 옵니다. 지불만 한다면, 언제라도 소비할 수 있습니다. 0이 몇 개 붙었는가 생각해보지 않도록 아래 단위가 80, 90인 액수를 굳이 숫자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카드 하나로 척척 슥슥 소비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와 일하다 보면 정말 이 세상은 온통 소비를 위해 직조된 것처럼 한국의 모든 포털은 결국 소비로 연결될 수 있는 ‘광고’창을 메인에 배치합니다. 무수한 광고가 난무하는 포털이 싫어 SNS로 떠났던 사람들을 따라 광고는 이제 SNS에도 난무합니다. 광고는 사람을 따라오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소비력을 따라옵니다. 심지어 SNS는 광고 노출 빈도와 실제 소비 활동 사이의 그래프를 만들어내 조금 더 소비를 이끌어낼 수 있는 로직을 발굴하고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판매합니다. 이런 로직을 좀 더 잘 사용할 수 있게 되면 ‘돈’을 벌 수도 있습니다. SNS 광고업에 요구되는 기술입니다.    

 


광고는 생산과 소비의 매개체로서 거래가 잘 이루어지도록 만들어진 거지요. 소비자에게 순기능을 얘기하자면 좋은 제품이나 서비스가 있다는 것을 알려줘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고 역기능을 얘기하자면 과도한 소비를 조장한다는 것입니다.   

  


과도한 소비가 뭐가 나쁘냐고요? 과도한 소비에 대한 욕구는 과도한 돈에 대한 욕구를 낳습니다. 그리하여 생산활동에 참여해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좋은 일인 것처럼 생각되게 만듭니다.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느냐보다 내 노동이 얼마만큼 수치화될 수 있느냐가 중요한 일이 됩니다. 연봉이 얼마인지 집값이 얼마인지 그런 것이 최상급의 가치가 됩니다. 실제로 그것이 주는 아주 잠시잠깐의 행복감에 도취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엿 바꿔 먹는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실감하게 되듯 그 연봉으로 무얼 할 수 있는지, 그 액수의 집으로 무얼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은 채 단지 그것을 소유한 것만으로는 오래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액수가 비싼 좋은 집은 아름다운 뷰와 편리함을 갖추고 있기 십상이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금싸라기 땅에 위치해 언젠가 있을 재개발이나 부동산 폭등으로 인한 차익을 기대하고 있는 거라면 그 집을 전세 주고 그 전세금으로 다른 뷰 좋은 집 전세를 얻게 될 겁니다. 그 집에 전세들어온 사람은 어떤 목적이 있어 그곳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걸 테지요. 한국사회에서는 주로 교육이나 이런 문제들이 이 선택에 끼어들곤 합니다.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데 말이야, 대신 시간이 없다면 그때부터 인생이 서글퍼지기 시작합니다. 돈은 있는데 쓸 여유가 없다가 어느 순간 펑펑 쓰며 그 돈이 주는 권력을 만끽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어딘가에서 갑질을 하며 그 권력을 느끼고자 하다가 신문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럼 돈이라는 권력, 뒤에 따라붙은 0이 몇 개인가로부터 권력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요?    

 


돈이 없을 경우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옷이야 그동안 있던 옷이 있다면 걔를 계속 입으면 된다 친다면, 당장 먹고 자는 일은 정말 돈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무료급식소를 전전하거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돈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받은 교육은 돈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배우는 교육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돈을 만들어내기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알아보는 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산수는 돈을 잘 계산하는 데 필요한 거고, 영어는 외국 사람들로부터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던 거죠.     



9-6로 사는 노동자가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은 소비를 할 때인 경우가 많습니다. 7시에 일어나 씻고 대충 밥 먹고 옷 입고 출근길에 올랐다가 나의 이익이나 만족이 아닌 자기에게 돈을 주는 집단의 이익과 만족을 위해 노동력을 지불해 10-20만원의 하루치 돈을 벌고(매일 주지는 않지만 월마다 정산해서 들어오는 돈이 그 정도일 수 있을 듯 합니다)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미 7시가 되었습니다. 밥 먹고 씻고 유튜브 좀 보다 휴대폰 좀 보다 잠이 듭니다. 다시 아침이 옵니다. 이런 상황이 매일 반복되다 주말이 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비를 할 때 행복해 합니다. 누군가는 냉장고를 채우는 것으로 행복을 찾고 누군가는 옷장을 채우는 것으로 행복해집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예쁜 옷을 입는 것으로 행복해진다고 할 수도 있지요. 이렇게 소비를 할 때 겨우 자기 존재라는 것을, 취향이라는 것을 아주 잠시나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욕구를 가진 사람이고 이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으며 돈을 지불한다면 아무도 거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돈을 지불한다면, 그게 타인에게 심한 불쾌감을 주거나 사회에서 합의된 어떤 규범을 저해하는 게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당신이 돈을 지불하고 무언가를 할 때 대부분 당신은 자기 욕구를 드러내며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 나는 고기를 좋아한다거나 나는 화려한 색감을 좋아한다거나 꽃무늬를 좋아한다거나 땡땡이를 좋아한다거나 그런 방식으로요.  

    


이 사회에서 돈을 생산할 때는 자기 취향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취향이 아니라 최근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 트렌드 등을 고려해야 하고, 규율, 규범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옷은 대부분 단정하고 튀지 않게, 아니면 유니폼을 입고, 식사는 정해진 1시간 이내에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어야 합니다. 아,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쾌적한 공기를 느낄 수 있는 데서 식사를 할까 할 때 내 돈 내 산한다고 해도 조건 1시간은 맞춰야 합니다. )이게 대부분 생산자로서 세상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소비를 할 때는 희미하게 자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살아있고 좋아하는 것들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요. 나는 돈을 내고 내 취향에 맞춰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이 있는 사람인 거죠. 물론 내 선택은 실은 내가 할 수 있는 소비의 바운더리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이 많고 많은 것들 중 이것을 선택하는 사람이고 그 근거는 내 마음, 판단에 따라서이다, 이런 겁니다.     



‘고기’라는 대단위 카테고리를 선택한 뒤 거기서 어떤 등급, 그러니까 최고급 한우를 먹을 것인가, 고기고기도시락을 먹을 것인가에 따르는 자본주의적 계급이라는 게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이것은 어쩌다 최고급 한우를 먹는 게 아니라 ‘늘’ 고기를 먹을 때는 그런 최고급 한우를 먹는 것을 의미하는 건데요.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평소에 소비하며 선택하는 범위가 아마 내 계급이 아닐까 합니다. 내가 아무 고민 없이, 오늘 특별한 날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선택하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실은 내 계급을 결정짓고 있는 것이겠구나 싶습니다.

     


이게 좀 더 심해지면 명품샵에서만 소비를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들은 남들이 1년 동안 벌어야 할 돈을 단숨에 소비합니다. 절대 그돈을 단숨에 소비할 수 없는 사람들은 명품샵에서 약간 주눅이 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는 얼마나 소비하고 사는 사람인지, 또한 이를 통해 그는 얼마나 생산하고 살 것인지 추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명품샵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돈으로 여기에서 물건을 사며 고객님이 되어줄 수 없으니까요. 고객님이 많아야 자기 존재의의가 있는, (아무도 사지 않는 명품샵이 계속 유지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 점원도 계속 그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점원 입장에서는 명품샵에 소비하지 않을 거면서 괜히 와서 귀찮게 하는 누군가가 싫을 수도 있습니다. 점원도 점원이기 이전에 사람이므로, 누군가 쳐다보는 것보다는 혼자 앉아있는 편이 마음이 편한 경우가 많을 테니까요.   

  


실제로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백화점에 구경갔다가 점원이 자기가 그 옷을 사지 않을 거라 생각해 자기 말에 잘 대답하지 않는 게 화가 나서 자기 인생에서 가장 비싼 점퍼를 샀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번 정도 입고 불편해서였는지 몸이 불며 사이즈가 작아져서였는지 그 옷을 입지 않았다며 제게 그 점퍼를 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생산과 소비 사이를 삽니다. 대부분은 주로 생산보다는 소비 근처에 있을 때 행복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에서 말했듯 소비는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소비를 위해 주어지는 권력도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생산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이 생산 속에 권력을 쟁취하거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안에 빠져드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장인의 행복한 고민이 뭘 먹을까, 아니면 뭘 살까, 어디 여행갈까이며 콘텐츠를 통해 삶을 위안하는 것을 보면 소비에서 누리는 기쁨이 더 큰 경우가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평등한 인간으로 태어나 한 인간으로 성장해가며 스스로 생각하는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배웁니다. 대한민국은 누구나 교육 받을 수 있는 평등한 교육의 권리가 있고 자기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더는 양반과 중인, 노비가 나누어지지 않는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은 교묘하게 짜여진 계급들, 드러나지 않는 계급에 대해서 또한 누구나 의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소유했느냐를 통해 드러나는, 그가 그것을 소유했으므로 다른 것 또한 쉽게 선택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하에 나타나는 부러움 같은 것들이 의식 속에 은근히 깔려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부모의 계급을 물려받아 그대로 이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느 순간 생산과 소비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짜증이 치밀이었습니다. 세계는 결국 생산자, 아니면 소비자만을 원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청 예쁜 디자인, 깔끔한 디자인, 좋은 생각, 아이디어, 선해보이는 어떤 것들 모두가 실은 생산자 혹은 소비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실은 너 생산자가 되든가 아니면 소비자가 돼, 로 보였습니다. 아니면 어딘가에서 만들어낸 돈으로 우리의 활동을 후원해줘도 있습니다. 또한 생산자가 되라는 유혹조차도 그것을 위해 우리 플랫폼으로 들어와 우리의 소비자라는 과정을 거쳐야 생산자가 될 수 있어, 내게 돈을 지불해, 우리 회원이 되어서 우리 세를 불리게 해줘, 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실제 돈이란 생산자나 소비자가 아닌 설계자가 되어야만 축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계자도 생산자에 속할 수 있을 테지만, 단순 생산자는 아니지요.      


어쨌든 이 아름다운 포장지, SNS의 예쁜 사진은 모두 생산과 소비 사이에 놓인 것이고 우리는 돈을 매개로 만날 수 있을 뿐입니다. 세계의 비밀은 이거였던 거죠. 한꺼풀만 벗기고 이게 진실이었고, (어릴 때는 그렇게 물질만능주의는 나쁜 거다, 물신화를 배격해야 한다, 이런 말들을 들으며 그게 진짜인 줄 알았는데) 실은 나 말고 다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서 더 화가났습니다. 세상이 이런 것을 일찍 알았더라면 하고요. 

    


그러니까, 방금도 글을 쓰다가 멈췄는데, 세상은 생산과 소비로 이루어진 쳇바퀴일 뿐임을 일찍 알았더라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더 많은 돈을 생산하기 위해 애써야 했을까요?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설계자의 반열에 올라야 했을까요?아니면 더 많이, 소비해야 했을까요? 아니면 더 많은 돈을 축적하기 위해 노력해, 진짜 파이어족의 길을 걸어야 했을까요?    

 


파이어족, 일찍 은퇴하고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을 이르는 개념입니다. 회사에서 톱니바퀴나 나사로서 일하며 돈을 생산한 뒤 나 자신을 위해 축적해두고 최대한 일찍 그 역할을 때려치운 뒤 그 돈으로 평생 먹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요. 더는 소비자의 기분을 고려하고, 트렌드를 고민하지 않고, 또한 소비라는 행위 속에서 자아를 찾는 이 생산소비의 바퀴를 벗어나 자기를 찾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이게 지금 쓰다 보니 거의 도 닦는 부처가 떠오를 지경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창업이 하고 싶어 이것저것 알아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책을 좋아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 속에서 살아가는 일로써 좋지 않을까 했는데, 문제는 ‘수익’이었습니다. 과연 책을 팔아서 돈이 되느냐의 문제인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돈을 만들어내야 할지의 문제입니다. 너는 어디에서 돈을 만들어낼 거야, 물었는데 보통은 투입과 결과물 사이의 간극으로 돈을 만듭니다. 물론 거기에는 ‘인건비’라는 명목의 인간의 힘과 시간이 들어가야 합니다.    

  


커피나무를 키워서 커피콩을 따고 이를 가공하고 보관하고 운반하는 일, 다시 이 중 좋은 생두를 선택하고 수입하기 위해 계약을 맺고 하는 일, 생두를 로스팅해서 원두로 만들고 분배해서 봉투에 담는 일, 그리고 이 소분된 원두를 팔기 위해 판매활로를 찾는 일, 그리하여 그렇게 소분된 원두와 함께 드리퍼나 머신을 사고 그 드리퍼나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또 잔과 받침을 사서 그 안에 담는 일,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이 모든 행위, 생산활동의 결과이며 커피 한 잔이 4-5천원이나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커피나무를 키우겠다고 창업 계획서를 내는 거라면 어떤 땅에 나무 몇 그루를 심어 얼마의 양을 재배해 누구에게 얼마나 팔 수 있을지 다른 커피나무와의 차별성은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합니다.     


책방의 경우는 이미 완성된 생산물인 책을 도매상에서 사서 소매업으로 판매한다고 해도 남는 이익이 미미할뿐더러 요새 책을 읽는 이들도 많지 않으므로 훨씬 더 판매가 어렵기에 책을 팔아서 돈을 벌 수는 없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차별점을 형성한다고 해도 애초에 남는 이익이 미미하므로 이게 쉽지가 않은 겁니다.     


실은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나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의 놀이터였습니다. 내 놀이터가 마음에 드는 사람은 같이 와서 놀아요, 이거요.     



누군가에게는 백화점이, 카페가 결국 놀이터이듯이요. 옷이나 그릇을 구경하고 선택하며 기쁨을 얻느냐, 세련되거나 내추럴한 분위기 속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컴퓨터와 사무도구밖에 없는 사무실을 잊으며 잠시 즐거운 뒤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면에서 그곳들은 어른들을 위한 놀이터지요.      


저는 소비로 자기 자신을 찾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소비를 하며 얻는 희미한 기쁨 대신 앎의 기쁨 같은 것, 공감의 기쁨 같은 것이 좀 더 유용하지 않을까, 좀 더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우선 나에게,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요.   

  


그러나 결국 공간을 마련하고 서가를 마련하고 책을 마련하는 것은 모두 소비를 통해 가능합니다. 소비를 위해서는 비용이 필요하고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창업지원서를 내다 보니 결국 ‘수익’에 대해 물었습니다. 어떻게 수익을 내겠느냐고 했을 때, 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윤을 창출하느냐는 거죠. 놀이터를 운영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각각의 놀이기구를 이용하는 비용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놀이기구의 상태를 점검하고 운영하고 수리하는 비용도 듭니다. 초기에는 놀이기구 이용 비용을 받지 않다가 나중에 거기 길들여지면 돈을 받는 방법도 있습니다. 대부분 플랫폼 기업들이 하는 일이지요. 그러나 제가 꿈꾸는 것은 이것은 아닙니다.      


생산과 소비, 그 이외의 틈새는 없는 걸까요? 영원한 자본주의의 노예로서 어떻게 돈을 만들어 돈을 쓸 것인가만 고민하는 세상을 벗어나고 싶은데, 그 답이 이리 쉽게 찾아진다면 누구나 벗어났을 테지요. 저 역시 여전히 답을 못 찾고 그 굴레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삶을 생산과 소비 사이에 놓인 채 살며 돈을 매개로 아주 많은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살 수 있게 해주지만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잠시 잠깐 기분이 좋을 수 있으나 오래 이어지는 만족감을 주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오래 삶의 태도를 이어갈 수 있는 어떤 길을 찾고자 했던 것인데, 세계에 존재하는 두 가지 활동, 생산과 소비 그 이외의 틈새가 있기는 한 걸까, 다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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