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대구 여행을 다녀와서
대구
서울 경기에서 3시간.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도시.
지금껏 여러 도시에서 살았고, 더 많은 도시들을 다녔지만 유독 대구라는 도시는 갈 기회가 없었다. 그 많던 지인들의 결혼식도 대구를 뺀 모든 광역시에서 있었다. 아껴두었다고 생각하자. 그곳을 이번 여름 짧게 다녀오게 되었다.
올해부터 프로야구 라이온즈 팬이 된 초등생 아들의 의견으로 여름 가족 여행을 대구로 일찌감치 정했다. 누가 보면 골수팬처럼 TV중계도 유니폼과 응원도구를 모두 갖추고 시청하는 모습이 우습지만, 열정만큼은 귀엽게 느껴진다. 이러한 아이의 작은 소원이 라이온즈파크(대구의 삼성 홈구장)에서 야구를 관람하는 것인데, 방학을 이용하여 꼭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소원을 들어줄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해도 얍삽하지만 조건을 덕지덕지 붙였다. 편식하지 않기, 숙제 잘하기,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기 등 여러 가지. 얼마나 가고 싶었는지 뭐든 참고 또 참으며 약속을 지키는 모습에 대구를 다녀와서 돌변할지 걱정이다.
여러 사정으로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다. 대구에서 근무했던 직장 동료가 라이온즈파크는 지하철로 이동하는 게 좋다고 하여 숙소를 중심지인 동성로에 잡았다. 당일 오전에 대구로 출발하여 낮시간에 시내 구경을 한 다음, 저녁 시간에 야구 관람을 할 계획이었다.
대구로 이동하면서 뒷자리 앉은 아내가 일기예보를 검색하여 대구에 비가 많이 올 것 같다며 나와 아이에게 놀란 듯 말해준다. 내가 며칠 전부터 아이에게 우천으로 경기가 취소될 수 있으니 실망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조용히 온 건데. 아이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정말 눈치 하나는 끝내준다. 아내가 지금도 신기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여행에는 전혀 무계획. 해외여행은 비행 중에 검색하는 것이 좋다는 웃긴 얘기를 자주 한다. 한 번은 이동 중에 어디를 가는지 물어본 경우도 있었다. 이에 반해 성격도 그렇지만 학교 체험학습을 많이 계획했던 나는, 30분 단위의 계획을 세우고 각 항목별로 취소될 경우와 우천 시 대체 장소까지 생각한다. MBTI를 신뢰하지는 않지만 J와 P는 정말 확실한 것 같다.
60%의 강수 확률이었지만 대구에 도착하기 1시간 전부터 비가 조금씩 떨어지더니 자동차 와이퍼의 속도가 남은 도착 예정 시간에 비례하여 빨라진다. 누가 생각해도 오늘의 경기는 우천 취소다. 예매사이트를 들어가니 많은 표들이 취소되었고, 정말 구하기 어렵던 VIP석도 자리가 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마음이 어렵다. 도착하여 우산을 사고, 동성로를 구경했다. 비가 오니 대구 중심부인데 사람도 없다. 왜 이럴 때는 모든 상황이 협력하여 쓸쓸함을 만드는지 모르겠다. 아이는 기도하며 실시간 경기 준비 상황을 검색한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빗줄기가 차츰 줄더니 결국 그쳤다. 그때부터 동성로가 참 아름다운 거리처럼 느껴졌고, 맛있게 늦은 점심을 먹고 라이온즈파크로 이동했다.
라이온즈파크는 신설구장답게 깔끔하고 시야 등 관람 편의가 무척 훌륭했다. 늘 원정팀을 응원하던 아이도 홈팀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응원하게 되어 신났던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아내는 야구에는 관심 없고, 티켓 검사대부터 우리 좌석에 도착하기까지 지나왔던 다양한 음식 코너들을 어떻게 관찰하고 기억하는지 하나씩 사 오라며 부탁한다. 분명 많은 사람들 속에서 떠밀리듯 이동했는데 놀랍다.
경기는 중반까지 라이온즈가 끌려가는 모습이고 오늘 이기기는 어려워 보였다. 뒷자리에 계셨던, 매일 경기장에 오시는 것 같았던 열혈팬 아저씨 한 분은 대형 응원 깃발을 연신 흔드셨다. 앞에 앉은 아이가 진지하게 응원하던 모습이 귀엽게 보이셨는지 큰 깃발을 함께 흔들자고 아들에게 제안하셨고, 아이는 힘차게 흔들었다. 아이에게 벅찬 감동을 주신 아저씨께 너무 감사하여 음료수라도 사드리고자 했는데, 중간에 역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는지 일찍 짐을 싸서 가버리셨다. 깃발만 흔드시다가. 열정과 인내는 비례하지 않나 보다. 결국 경기는 졌지만 재밌는 경기 관람이었다.
다음날, 일찍 출발하는 일정이지만 대구를 또 언제 올지 몰라 한 곳을 들렀다가 집으로 가고자 했다. 여행을 가면 그곳의 전통 시장을 자주 찾는 편인데,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문시장이 있었다. 대구에서는 유명한 전통시장 중 한 곳이고 맛있는 먹거리가 많다고 했다. 오전에 도착하여 많은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아 아쉬웠지만 매운 어묵과 유명한 떡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짧았지만 즐겁게 일정을 마무리했다.
부산이 고향이라 경상도 사투리는 언제 들어도 정겹다. 친누나는 아직 사투리를 쓰고 있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대구에 있는 동안 동성로에서, 야구장에서, 서문시장에서 사투리를 들을 때마다 옛날 추억이 하나씩 떠오르는 것이 신기하다. 감각은 기억을 불러오는 것인가? 너무 오래되어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좋았던 생각과 느낌들을 되새기게 된다. 그때는 몰랐지만, 행복했던 추억이 많았던 어린 시절이 감사하다. 다정하게 아이에게 깃발 응원을 제안해 주신 아저씨께 그런 의미에서 더욱 감사했다. 훗날 되새길 좋은 추억이 아이에게 생겼으니 이번 여행은 짧았지만 대만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