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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고시의 추억

불합격의 쓴잔이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by 하이브라운

(중등) 교사 임용후보자 선정경쟁시험


흔히 부르는 임용고시의 정식 명칭이다. 초등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서 초등, 중등이 나눠서 시험이 진행된다.

임용고시는 각 시도교육청이 뽑을 인원을 정하고 시행한다. 문항이나 시험 시기는 같으나 선발 인원이나 장소는 매해 시도교육청이 정한다. 지금처럼 시험 몇 달 전에 사전 예고가 없던 시기라 시험을 앞두고 발표되는 공고를 통해 그 해, 그 지역의 선발 인원과 여러 사항을 확인한다.


내게도 임용고시 추억이 많은데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난 2009년 대학 졸업 후 첫 임용고시에 응시했다. 지역은 서울. 그 당시 1,2,3차 시험을 통해 2배수, 1.5배수, 최종 합격자를 선발할 때이다. 한 달 간격으로 3번의 시험 응시와 3번의 결과를 기다렸던, 돌아보면 정말 잔인하고 숨 막혔던 시험이다.

관련 학과를 전공하지 않은 나는 교직 이수를 통해 교원자격을 취득하였고, 임용시험은 누구나 힘들어하지만 나는 시험이 공정하여 오히려 좋았다. 우리 사회의 여러 '연'을 신경 쓰지 않고 정해진 범위 안에서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시험. 범위는 방대했지만 누구에게나 오픈되었고 공부한 만큼 결과를 얻는 시험이라 부담은 있었지만 걱정은 없었다.


1차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운이 좋았다. 어디에나 있는 초심자의 행운인가? 숨 막히게 공부했던 노량진의 실력자들보다 높은 점수를 얻었다. 임용시험의 또 다른 고통 중의 하나인 결과를 모르고 다음을 준비하는 것. 1차 시험의 합격 여부를 모른 채 2차를 준비해야 했다. 합격자 발표 후 2주 정도 지나면 2차 시험이 있으므로. 가채점으로 어느 정도 마음 편히 2차를 준비했다. 1차는 합격.


2차 시험은 논술이다. 정말 2~3시간을 쉬지도 않고 글을 써야 한다. 고민할 시간이 없다. 문항을 보고 개요를 대략 짠 다음, 바로 작성 시작이다. 그렇게 쉬지 않고 서론-본론-결론을 1시간 쓰면 1교시 끝. 반복해서 2교시 끝.(3교시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2차 시험을 마치고는 전혀 합격과 불합격에 대한 감이 오지 않았다. 떨어지더라도 다음 해를 위해 3차를 준비해야 한다는 한결같은 조언을 들으며 3차를 준비했다. 다행히 2차도 합격.


3차 시험은 수업지도안 작성과, 수업 실연, 면접이다. 스터디를 구성하여 하루 종일 나-수험생, 너-면접관 연습을 반복하고 스터디원 앞에서 10분짜리 수업을 한다. 수업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열심히 준비했다. 여기서 한계를 느꼈다. 수업지도안 작성과 수업 실연은 매우 현실적인 내용이라 비전공자인 내가 정보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경험이라고는 교생 실습 한 달뿐인 나였다. 학과 교수님, 현직 선배의 조언을 듣고 자료를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매우 부러웠다. 적자생존의 야생에서 자료를 공유해 줄 사람은 없었다. 나름 인터넷을 검색하며 준비했다. 실제 시험에서도 지도안 작성과 수업 실연은 내가 채점자라도 민망할 정도였다. 면접은 나름 잘 봤다.


1,2,3차 시험의 성적이 합산되는 최종 결과는 0.1점 차 불합격!

300점 만점이었으니 커트라인 바로 아래였다. 이 점수가 한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시험 결과의 후폭풍은 나보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로 인해 크게 느껴진다. 서로 조심하는 극도의 긴장된 상황.

섣불리 위로할 수 없고, 그렇다고 조용히 있기에는 미안한 상황. 그것을 온몸으로 감지하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모르는 나.

'0.1점으로 일 년을 숨 막히는 노량진 라이프로 돌아가야 하는가?'

'다시 시험을 본들 3차에 대한 자신이 있는가?'여러 생각 끝에 계속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것보다 기간제교사를 하며 현직의 경험을 쌓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간제교사를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집과 가까운 여러 학교에 원서를 넣었지만 대부분 연락이 없었고, 연락이 온 곳도 "정말 경력이 하나도 없느냐?" , "학교가 처음이냐?" 등의 경험의 유무만 확인하고 아쉬운 듯 통화를 종료하기 대부분.(지원서 검토에서 대부분 탈락하는데 이때도 남교사가 귀했던 시절이라 인력을 확보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처음부터 경력이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경력을 살 수만 있다면 사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개학을 바로 앞두고 집 근처 중학교에서 첫 기간제교사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첫 기간제교사를 했던 학교와 그곳의 사람들. 정말 내겐 축복이었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2009년 합격의 순간과 2009년 그곳에서의 기간제교사 생활을 지금 선택해서 돌아가라고 한다면 양심을 걸고 난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진짜다. 이건 꼭 믿어주세요. 그곳에서 교직생활 평생의 가르침을 얻었고, 지금도 이어지는 소중한 사람들을 얻었으며, 지금의 기간제교사들을 대하는 마음을 배웠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꼭 글로 쓰고 싶다. 쓸 것이다.


마무리하며, 곧 2025 임용시험의 최종 결과가 발표된다. 어딘가에는 환호가 어딘가에는 슬픔이 있을 것이다. 시험 준비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괜찮다고는 쉽게 말 못 하지만 10년이 지나면 누군가를 위로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부족한 나처럼.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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