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페미니스트세요?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본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이 된 것 마냥 말을 흐리게 된다.
"글쎄요오...?"
한 마디로 잘 모르겠다. 페미니즘 책을 몇 권 읽은 것도 사실이고 페미니즘 스터디나 모임에 나가 본 적도 있고 여성운동을 직간접적으로 한 것도 맞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페미니스트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망설일 것 같다.
아마도 내 안에서 '페미니스트'란 역사 속 위대한 여성 운동가들처럼 담대한 전사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게 페미니스트라면 난 당연히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난 겁도 많고 부당한 일에 맞서기는커녕 몸 사리고 미래사회를 걱정하기보단 당장 내일을 걱정하는 소시민이다. 난 담대한 전사와는 거리가 멀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 '바꿀 수 없다면 적응하자'가 오랫동안 내 인생 모토였다. 그래서 사회가 날 받아들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상관없이 난 사회에 속하려고 부단히 도 노력했다.
결과는 대참패. 나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난 사회에 이단자가 되었다. 사회에 속하기 위해서 난 나에게 숱한 거짓말을 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고 넓은 마음 인척 모두를 포용하려고 했다. 난 지쳤다. 나에게 거짓말을 한 날에는 잠이 안 왔다. 불현듯 생각나기도 했다. '그때 그렇게 말하지 말걸... 동조하지 말걸...' 난 이렇게 살기 싫었다. 또 마침 내가 대학생일 때 한국 내 페미니즘 운동이 불을 지핀 듯 커져갔던 시기였고 난 자연스레 그들에게 편승했다. 당연히 모든 운동과 학문이 그렇듯 페미니즘도 그 안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난 이리저리 풍파를 맞은 듯 흘러 다니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담대한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들은 강인했고 뚝심 있었고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행동했다. 난 그러지 못했다. 난 여전히 겁이 많았고 그들에 비해 소심했다. 그들에 눈에 난 아마도 페미니스트로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혐오 앞에 눈 감은 적도 많고 귀 닫은 적도 많으니까. 그리고 난 그런 내가 너무나도 답답했다.
지금은 달라졌느냐 묻는다면... 아니, 그대로다. 여전히 겁 많고 흐린 눈 하는 것도 잘한다. 그래도 이전처럼 나를 갉아먹지는 않는다. 내가 밤잠을 설칠 것 같다면 혐오 앞에 담대해진다. 직설적으로 말하진 않더라도 꼭 한마디는 했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했다. 나의 말과 행동들은 아주 작아서 비록 세상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나를 구하기엔 충분하다. 이런 쫄보도 페미니스트냐고 묻는다면... 글쎄... 반(半) 페미니스트라고 말해본다. 간헐적 담대함을 지닌 쫄보 반 페미니스트이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 건 언제나 용감한 영웅들이었다. 그들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앞장선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웅도 아니고 영웅이 될 생각도 없다. 세상을 바꾸고 싶지만 그게 너무 버겁고 힘들다면 그냥 나를 바꾸고 구하는데 열중하면 된다. 나의 말과 행동이 너무나도 작아서 별 도움이 안 될까 싶지만 그런 작은 행동들이 십시일반 모이면 하나의 영웅적 행동이 되는 법이다. 그게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 인권이건 환경이건 동물복지건 어떠한 학문적 운동이건 간에 상관없다. 당신의 아주 작은 말과 행동은 처음에는 당신을 구할 것이고 다음에는 세상을 구하는데 일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