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따위 내 알바 아니야
'비혼(非婚)'이라는 말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전에 우리는 혼인 여부를 물을 때 기혼과 미혼으로만 나누었었다. 지금이야 비혼이라는 단어가 거의 정착되어서 비혼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비혼이라는 단어가 처음 화두에 올랐을 땐 그게 미혼과 뭐가 다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혼(未婚)이라는 뜻은 '아직 결혼하지 않음'이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결혼을 할 사람이라는 뜻이다. 결국 기혼과 미혼 밖에 선택지가 없었을 때는 결혼한 사람과 결혼할 사람으로 나누었다는 거다. 이는 곧 모든 사람은 결혼한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당연히 모든 사람이 결혼하지는 않는다. 그중에는 분명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하지 않았고 결혼할 생각 없음'을 의미하는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다. 그게 비혼이다.
비혼 주의자.라고 하면 굉장히 굳건한 맹세를 한 것 같고 엄격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엄격하고 굳건한 사람들은 별로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은 스펙트럼 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 정도의 차이와 비혼의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비혼을 독신주의자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혼자 외로이 늙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건 곤란하다. 비혼은 결혼제도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지 홀로 무인도에서 사는 것 마냥 살아간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비혼일수록 인간관계를 촘촘히 다져야 하고 비혼인들끼리 공동체 문화를 형성해야 살아갈 맛 나겠다는 입장이다. 우리는 서로 각자의 사정과 가치관으로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이 사회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우울증도 안 오고 건강하다.
내가 결혼 생각이 없다고 말하면 그 이유를 묻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이다. 그럼 난 이렇게 답해준다.
"내 주변에 결혼해서 잘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사실이다. 그래서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결혼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주변에 결혼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행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도, 우리 이모도, 아르바이트하던 가게 사장님도, 이웃집 아주머니도. 다들 결혼하고 팔자 꼬인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가족을 위해 쉴 새 없이 일했지만 정작 쓸 수 있는 돈은 없었고 자식은 둘이 낳았지만 혼자 키워야 했다. 남편은 집안의 돈을 까먹거나 외도를 했으며 시가는 시가대로 쪼아대기 바빴다. 내 기억 속에 엄마와 아빠가 사이가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끔 밤에 날아다니는 화분이나 접시는 생각난다. 처음에야 무서웠지 익숙해지니 그냥 다소 날카로운 일상이었다. 난 중학생 때 엄마에게 제발 이혼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같이 살다 누구 하나 죽는 것보단 이혼하는 게 백번 낫지 않나. 하지만 엄마는 이혼하지 않았다. 내가 21살이 될 때까지 흔들 다리 같은 집이 유지되었다. 그 이후 아빠와 따로 살게 된 엄마는 전보다 더 건강해지고 젊어졌다. 취미 생활도 많아지고 직장도 다닌다. 그래서 난 생각했다.
'역시 결혼은 하지 않는 게 낫구나.'
아빠와의 이혼을 준비 중인 엄마에게 물었다.
"재혼하고 싶은 생각 있어?"
"아니. 이젠 결혼이라면 넌더리가 나. 한 번 해서 죽을 둥 쌌음 됐지 뭘 또 해?"
그게 우리 엄마의 결혼에 대한 소감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내게 결혼하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네가 원하면 하는데... 그거 안 해도 돼. 엄마는 항상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비혼을 선택하더라도 후회할 일은 없다고 말했다. 내 주변에 결혼해서 고생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혼을 하거나 별거를 선택했다. 그들은 그러고 나서 얼굴이 되려 폈다. 결혼으로 고생했던 그들은 결혼을 예찬하지 않는다.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자애들에게도 결혼 얘긴 하지 않는다. 그까짓 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안 하는 게 더 나을 수 있을지도....라는 식이다. 우리 엄마는 내게 결혼 얘긴 하지 않는다. 대신 경제력을 키우라는 얘기를 한다. 이 얘긴 한 백번은 들었다.
"여자는 무조건 경제력이야. 돈이 있어야 자유로워."
심지어 우리 엄마는 내게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가르쳐주거나 시키지 않았다. 내가 해보고 싶다고 하면 반대했었다.
"여자가 손재주 좋으면 평생 가난하게 살아. 넌 이런 거 하지 마."
엄마는 딸이 결혼해서 남편에 기대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시대에 대학도 나오고 대기업과 외국 기업에서 일했던 자신도 결혼해서 이렇게 사는데 딸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난 결혼 스트레스 따윈 없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니 우리 엄마도 얘기 안 하는 내 결혼을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혼을 왜 안 해? 결혼하면 좋아. 결혼 안 하면 늙어서 아프면 어떡해? 혼자잖아. 지금은 젊어서 괜찮을지 몰라도 나이 들면 옆에 누가 있어야 돼.
결혼하지 않으면 왜 혼자 쓸쓸히 죽어갈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결혼하지 않아도 난 여전히 내 친구들과 같이 있을 거고 결혼하진 않았지만 동거하는 애인이 있을 수도 있고 혼자 살더라도 동네 이웃 네트워크를 활발히 다지고 있을 수도 있다. 오히려 결혼하고 나서 나의 인간관계가 가족이 전부면 그게 더 외롭지 않을까?
앞으로 비혼의 비율은 더 늘어날 것이다. 이제 결혼이 필수라고 생각하던 시대는 끝났다. 우리는 이제 결혼제도가 아닌 가족을 이룰 다른 사회적, 법적 제도를 갈망할 것이고(생활 동반자법) 집 안에서는 혼자여도 집 밖으로 나가면 이웃이나 친구, 지인과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혼자만의 공간을 이룩함과 동시에 타인과 관계 맺을 것이고 기존의 혈연과 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족 형태에서 벗어난 가족들을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 주변에도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충분히 사랑한다.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외롭지 않다고 한다. 그들은 배우자 대신 친구를 만나고 동호회 활동을 하며 애인과 결혼하지 않고 연애만 한다. 그들은 언제나 열려 있다. 언젠가 결혼할 수도 있겠지. 근데 그게 지금은 아니야. 나중에 결혼이 하고 싶어질 수도 있겠지. 근데 지금은 안 한 상태가 더 좋아. 결혼한 삶보다 결혼하지 않은 지금의 삶에 더 만족해. 나이가 더 들어도 비혼일 것 같아. 결혼제도에 날 갈아 넣는 것보다 나에게 모든 걸 쏟는 지금이 더 좋아. 어떤 이유에서 비혼을 하건 그게 얼마나 확고하건 간에 우린 비혼을 선택했고 현재 그 삶에 만족하고 있다. 또, 여전히 기혼과 미혼이 압도적인 사회에서 잘 살아보기 위해 우리끼리의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를 공고히 하는 데에도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