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6시 반 대화의 장이 열린다. 그리고 술판도 함께 열린다. 우리 부부는 매일 저녁 6시 반이면 각자의 술을 꺼내고 안주 겸 저녁을 차려서 얘기를 시작한다. 대화의 주제는 매일 다양하다. 정치, 경제를 뺀 그 모든 주제가 우리의 저녁상에서 끊이지 않는 얘기의 소재거리가 된다. 6시 반부터 시작되는 저녁상은 아이가 잠들 시간인 8시 반은 돼야 정리가 되고 아이를 재운 후 9시부터 2차 대화가 시작된다. 매일 이렇게 3시간 이상을 남편과 얘기를 하는 건 우리 가족의 평범한 저녁 일상이다. 아이 역시 한자리 차지한 채 오늘 있었던 일이나 궁금했던 일, 연예인 이름 맞추기 등등을 조잘거린다. 요즘엔 일주일에 2-3번 아이 친구가 놀러 와서 밤 10시 정도까지 놀다 가는데 그런 날은 우리 부부에겐 더 신명 나는 날이다. 아이들끼리 따로 저녁을 줄 수 있어 부부끼리만 먹고 마시고 얘기할 수 있어서 그런 날은 얘기가 더 길어진다. 어떤 날은 남편과 얘기하다가 식탁에 엎드려 뻗은 채 자는 날도 있다. 맥주캔과 저녁상이 널브러진 식탁에서 얼굴을 박고 잠든 내 모습은 무척 처참하지만 남편은 조용히 저녁상을 치우고 중얼거리는 나를 질질 끌고 침대로 눕혀준다.
나는 40대 중반, 남편은 50대로 우린 함께한 지 15년 차다. 우린 누구나 그렇듯이 처음엔 너무 좋았고 육아가 시작된 후엔 지옥이었고 그 이후 몇 년간은 불지옥이었다. 남편은 너무 바빠서 아침에 훌쩍 나가 밤에 들어오는 게 일상이었고 내 불만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내 속에 언젠가부터 자리 잡은 뿌리 깊은 욕구불만과 낮아진 자존감의 모든 원인을 남편에게서 찾았다.
“오빠는 그렇게까지 뽕을 뽑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들어와야 직성이 풀려?”
“광고주들이 다 남아있는데 그럼 나 혼자 와이프 때문에 들어가야 한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올 수 있다고 생각해? 사회생활 안 해본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내 사회생활이 누구 때문에 망가졌는데! 나는 뭐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줄 알아?”
“나는 그럼 마냥 좋고 행복한 줄 알아? 나도 힘들다고! 회사에선 대표님 때문에 죽겠는데 집에서까지 꼭 이렇게 사람을 들들 볶아야겠어?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서로 죽을 만큼 화를 냈고 죽을 만큼 노려봤고 죽을 만큼 증오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남편생각만 하면 울분감에 그릇을 내던져 깨부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자신을 찾으려 많은 노력을 해봤다. 그러나 난 나 자신이 아닌 내 안에 자리 잡았던 남편을 찾는 게 시급했다. 아무리 나 자신을 찾아도 내가 사랑했던, 한평생 함께 하고 싶었던 남편이 없다면 난 온전한 나로 바로 설 수가 없었다. 남편을 만난 이후론 내 곁에 그는 쭉 함께였다.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항상 그를 찾았고 그는 내게 남편이자, 친구이자, 부모이자, 나 자신이었다. 그를 미워하는 나는 내가 아니었고 그가 없는 삶 또한 내 삶이 될 수 없었다.
우린 제주로 이주 후 많은 시간을 함께 가졌다. 서로의 관심사를 비방하지 않고 함께 나눴다. 남편은 그동안 삶에 바빠서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이직전 몇 개월 쉬는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읽었다. 내가 즐겨보던 책들 위주로 읽기 시작한 그는 내가 느낀 감동을 함께 느꼈고 더 나아가 본인만의 취향의 책들도 찾아가면서 많은 양의 책들을 정독했다. 주문한 책이 빨리 도착하는 날엔 설렘 가득한 얼굴로 박스를 뜯으며 어떤 책을 샀는지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내게 얘기를 해줬고 다 읽고 난 후엔 저녁을 먹으면서 읽었던 책얘기를 나눴다. 날카롭기만 했던 우리의 대화는 점점 더 키득거림과 다정한 공감력이 가득한 대화로 바뀌어갔다. 다양한 주제로 펼쳐지던 대화는 결국 한 가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삶의 본질이었다. 우리가 왜 함께하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며 어떤 행복을 원하는지 모든 건 우리 안에 해답이 있었다. 서로를 원했고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고 함께 이 고단한 삶을 웃으며 의지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현실에 부딪혀 잊고 살았지만 서로에게 원했던 건 그다지 큰 게 아니었다. 믿고 사랑하고 행복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건 남이 해줄 수도, 책에서 찾을 수도 없는 서로가 해줘야 하는 작지만 큰 역할이었다. 우린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했다.
한 생명의 소멸이 새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듯 변화는 당신의 성장과 행운을 약속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우주의 에너지가 당신에게 ‘변화’라는 기회를 주고 있으니까요. 행운의 기회를 붙잡기 위해 당신은 내면의 잠재력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래서 내면의 건너편에 있는 더 큰 나를 만나는 것이지요. 이것은 당신에게 새로운 행운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미랍니다. 진정한 나를 만나고, 변화하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행운을 얻는 첫 걸음입니다. 이서윤 <<오래된 비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책인 이서윤작가의 ‘오래된 비밀’속 한 구절이다. 남편은 이 책을 몇 번씩 읽으며 우리의 관계를 행운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로에게 행운으로 다가온 관계가 부부사이다. 삶에 치여 행운을 불운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악연으로까지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게 인간관계이지만 반대로 다가왔던 행운을 위해 나를 변화시키고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면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내 반려자가 내게 가장 큰 행운이 될 수가 있다. 행운과 함께하는 삶, 얼마나 감사하고 멋진 일인가.
오늘 저녁엔 남편과 달달한 와인 한 병 까마시고 싶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내 삶의 가장 큰 행운이라고. 매일 저녁 당신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이 시간을 선물해 줘서 고맙다고. 벌써 저녁상의 달달함이 코 끝에 맴도는 것 같다. 내 곁엔 항상 행운이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