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새벽 5시 반에 기상한다. 동네 닭님조차도 아직 기침하지 않으신 어둑어둑한 새벽시간에 일어나는 걸 사랑한다. 어제 마신 술의 체취가 온몸으로 느껴지지만 이 정도 숙취는 찬물 한잔으로 날려버리고 머리통을 만져달라며 애용거리는 3마리의 고양이들을 어루만진 후 테라스로 잠시 나가 떠오르는 햇님을 멍하니 쳐다본다. 제주의 하늘은 어찌나 매일 봐도 새롭고 이쁜지. 높고 웅장한 하늘이 매일 안겨주는 밝음에 대한 에너지는 매일 봐도 매일 새롭다. 잠시 뒤 어디선가 들려오는 닭님의 꼬끼오~! 소리와 함께 동네 개님들의 합창 짖음이 시작되고 푸다닥 날아오르는 새님들의 날갯짓과 함께 또다시 새로운 아침이 시작된다. 아잉 개운해. 오늘도 혼자 맞는 이아침의 시간이 너무 좋다.
곧이어 남편과 딸이 일어나고 잠시 정신없는 시간들이 흘러간다. 이거 어딨어 저거 어딨어를 외쳐대는 따님의 입도 막을 겸 간단한 아침을 챙겨주고 남편과 아이의 등을 떠밀며 출근과 등교를 시킨 후 아침수영을 향해 달려간다. 수영을 하는 건지 수영장 물을 들이켜는건지 알 수 없는 몸부림 가득한 발버둥을 열심히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온다. 활기가 넘친다. 아직 몸에 남아있는 수영장냄새가 좋고 내려지고 있는 커피의 향이 좋다. 노트북을 열고 오늘 하루의 나의 가장 중요한 일과인 글쓰기를 시작한다. 가족과의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을 이렇게 혼자 지낸다.
도시에 살 때는 혼자 있으면서도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 있고 싶다고 하면서도 막상 혼자 있으면 공허했다. 주변인들의 SNS를 뒤지며 나를 아무도 찾지 않음에 외로워하며 혼자 보내는 시간을 즐길 줄 몰랐고 자발적으로 혼자를 택했음에도 내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난 혼자가 된 것만 같았다. 마음만 바빴고 초조했고 나만 도태되고 있다고 느껴졌다. 모임이 생겨 누군가를 만나도 외로움은 마찬가지였다. 분명 나는 그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얘기를 하고 밥을 먹고 있는데 나만 저 멀리 다른 공간에서 떨어진 채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 같았다.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의 연속이었다. 물과 기름은 내 안으로까지 흘러들어와 나 스스로의 내면끼리도 섞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원하는 게 분명 있는데 난 원하는걸 말로 꺼내지도, 얻기 위해 행동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공간의 이동, 제주로의 이동 후 제일 시급했던 일은 내가 원하는 일을 정확히 바라보고 그걸 스스로 알아채는 일이었다. 내가 바꾼 공간에서 나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환경을 바꾼 자신감으로 인해서일까. 주변의 눈치코치를 벗어나 나를 바꿀 수 있다는 내면의 용기가 불타올랐다. 과거 어떤 삶을 살았든, 어떤 후회가 있었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고 싶었다. 버리고 싶은 모습은 탈탈 털어 버리고 갖추고 싶은 모습은 더 많이 갖추며 진짜 나 다운 나를 끄집어내고 마주하기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나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시간은 나를 인정하고 어루만져주고 단단해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어느새 지금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진심으로 즐기게 되었다. 내 시간을 위해서 인사치레의 만남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고 내가 해야 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아는 지인께서 얼마 전에 해준 말이 있었다. ‘제주는 처절하도록 혼자 지낼 수 있어야 하는 곳’ 이라고. 그런데 어쩌면 제주에서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 내가 있는 곳 어디든 해당되는 얘기 같다. 내가 나 자신과 가장 잘 지낼 수 있게 되자 가족과도, 타인들과도 여유롭고 단단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내 행복의 모든 것은 밖이 아닌 내 안에 있었다.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의 삶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어 보여도 그건 내 삶이 아니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집안, 나와 함께 하는 내 가족, 내가 채워줘야만 하는 나 자신, 그 모든 것들은 다 내 ‘안’을 향하고 있었다.
‘문득 내 마음 안에 있는 상처 입은 아이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 아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다독이자 어느새 보채던 아이가 새근새근 잠이 든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내가 좀 더 그 아이에게 너그러워진다면 그 아이는 멈추었던 성장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김혜남,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내 안에 고여있는 성장의 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기다려왔다는 듯이 물살은 점점 더 거세지고 힘차게 흘러가며 서로 부딪히고 어우러져 새로운 길로 나를 인도해 준다. 흐름에 따라 점점 더 강하게 삶을 즐겨나가고 싶다.
내일의 새벽닭님의 울음소리가 기대된다. 같지만 다른 새로운 하루가 다가오고 있다. 내일도 나는 여전히 혼자 글을 쓸 예정이다. 감사함이 벅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