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이의 수학 수행평가가 있었다. 우리 따님은 초등학교 3학년 중반을 달려가면서도 아직 구구단을 다 외우지 못하고 있다. 학교수업은 벌써 3 자릿수의 곱셈이 나오고 있는데 구구단을 다 익히지 못한 상태라 따님은 수학시간이 있는 날이면 한숨을 쉬며 수학을 저주한다.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 수학을 온 마음을 다해서 저주했던 터라 아이의 괴로움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같은 마음으로 함께 저주를 해준다. 엄마인 내가 아이를 붙들고 구구단정도는 외우게 할 수 있겠지만 난 초1 때부터 아이의 공부는 전혀 봐주지 않고 있다.
아이의 친구관계나 말투, 사람을 대하는 법에 대해선 언제나 주의 깊게 보고 있지만 공부는 내 기준에선 내가 관여할 범위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교육적인 부분으로 무슨 큰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냥 난 공부를 싫어한다. 어른이 돼서 가장 좋은 게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데 아이를 위해서 다른 해줄 것도 많건만 그 싫었던 공부까지 다시 하면서 나까지 괴롭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난 아이가 가끔 수학숙제를 가져올 때면 도망가 버린다. 모르면 선생님한테 가서 물어보라며 엄마는 지금 급히 할 일이 있다며 그냥 튀어버린다. 그래선가 자기도 답답한지 요즘은 성질을 내면서도 혼자 구구단을 중얼거리며 외우곤 한다. 역시 급하면 다 하기 마련이다.
“엄마! 나 오늘 수행평가 봤는데!”
“응응 어땠어?”(떨렸다. 반에서 70점 미만인 아이들은 매일 수학시험을 보게끔 돼 있다)
“나 한 문제 차이로 72점 받았어!!!”
“우아아아아!! 대애애애박!!! 우리 딸 천재 아니야? 어떻게 70점을 넘었어~~!!!!”
“므하하하하!! 거봐 역시 나라니까~! 게다가 그 한 문제는 찍은 문제야~!!! 므하하하하”
“헐!!! 찍었는데 맞았어?? 역시 우리 딸!! 우리딸 손은 황금손이구먼!!!!!!”
축제의 장이 열렸다. 구구단도 다 못 외운 녀석이 72점이라니!!! 난 공부는 봐주지 않지만 아이가 해온 점수에 대해선 몇 점을 받아와도 수고했다고 잘했다고 칭찬을 대박 날려주며 너는 역시 운이 좋은 아이라고 항상 얘기해 준다. 이번 수행평가 역시 찍은 한 문제로 인해서 70점을 넘길 수 있게 된 아이는 자신은 역시 황금손이라며 기쁨을 두배로 느꼈다.
아이는 언젠가부터 스스로 운이 좋은 아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짝을 정하는 뽑기를 할 때도 좋은 짝이 나오곤 하고 될 놈만 된다는 그 어려운 인형 뽑기 기계에 도전할 때도 꼭 하나의 인형을 뽑아내곤 한다. 물론 실제론 운이 없을 때도 많다. 싫어하는 친구가 짝이 되기도 하고 잘되던 인형 뽑기 역시 어떤 날은 하나도 뽑히지 않아서 울먹거릴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아이에게 금방 잊히고 행운이 찾아온 날의 대한 기억만 오래 간직한다. 긍정적이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단단히 깔려 있다.
커오면서 나는 부모님께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먹고살기 바빴고 아빠는 입대신 걸레를 물고 사신 분이셨다. 부모의 칭찬을 받아보지 못하고 커온 나는 내가 무얼 잘하는지 몰랐고 잘할 수 있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도 아빠는 내 전공이 시각디자인이라는 이유로 어디서 빌어먹고 살 팔자라며 입에 문 걸레를 신나게 흔들었고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도 누구나 다 하는 취업 못하는 게 등신이라며 역시나 온몸으로 걸레춤을 추었었다. 내게 어떤 좋은 일이 생겨도 집안에선 쓰잘데기 없는일이 돼버렸던 삶을 살아왔던 나는 언제나 칭찬에 목말랐고 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스스로를 의심하고 채찍질하고 끊임없이 다그쳤다. 이 정도는 해야 해. 이 정도 이상은 해야 해 하면서 내가 노력한 이상의 운을 바라지 못했다. 행운은 언제나 타인의 것이라 생각했고 난 그 행운을 쥘 수 없는 사람이니 노력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받아보지 못했던 칭찬과 인정의 욕구의 결핍은 내게 행운이라는 단어는 기대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꽤 오래전에 텔레비전에서 리본체조 경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외모가 아름다운 선수와, 미안하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가 경합을 벌이고 있었지요. 기량 면에서는 분명 외모가 아름답지 않은 쪽이 좀 더 뛰어났는데, 결국 우승은 아름다운 선수가 거머쥐었습니다. -중략- 외모가 아름다운 선수는 어렸을 때부터 주위로부터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친절한 대우를 받아왔을 겁니다. 당연히 좋은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을 테지요. 한마디로 ‘오늘은 운이 좋구나!’라고 느끼는 날이 많았을 겁니다. 이런 사람은 중요한 승부에서 커다란 운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운의 힘은 셉니다. 실력보다 더 셉니다. 왜냐하면 실력은 인간의 힘이지만, 운은 하늘의 힘이기 때문이죠. -사이토 히토리 <<부자의 운>>
내 아이에겐 하늘의 힘이라는 행운이 항상 곁에 따라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행운이란 가정에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나는 아이가 무언가를 하기 전부터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스스로 가졌으면 좋겠다. 아이가 스스로를 사랑하고 믿을 수 있도록 부모인 나부터 아이가 무엇을 잘 하든 하지 못하든 우선 믿고 기다려준다. 수학문제는 풀어줄 수 없지만 행운이 따르는 아이로 키워나가고 싶다. 그래서 난 아이를 신뢰하고 존재자체에 대한 인정을 최대한 많이 해주려 노력한다. 아이라는 행운이 내게 와주었으니 나는 더 큰 행운이 아이에게 맴돌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주고 싶다. 행운은 믿는 자에게 머문다고 한다. 아이는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아이큐를 가졌지만 우리 집에서 만큼은 요정도 울고 갈 미모를 지닌 세상 똑똑한 하나뿐인 외동딸이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사랑받음에 자신이 있고 그 자신감은 아이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노력만으론 도무지 힘든 그 어느 순간이 왔을 때 자신의 노력 이상의 커다란 행운을 아이가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오늘도 아이에게 말해준다.
‘넌 운이 좋은 아이라고. 그러니 언제나 너를 믿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