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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Apr 03. 2023

다름에 대하여#1

날씨



"나 오늘 몸이 좀 안 좋아."

"에구, 날씨 때문이야."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 보이네."

"응, 기분이 별로야."

"날씨 때문이야."


"점심 잘 먹었어?"

"아니, 입맛이 없어서 안 먹었어."

"날씨 때문인가 봐!"




내가 필리핀에서 지낸 것은 1,2월. 이들로는 우기이다. 도착한 날부터 비가 부슬부슬 오더니 돌아오는 날까지도 비와 함께였다. 여름이 계속인 나라의 마트에서 패딩점퍼와 스웨터를 파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실제로 그것들을 입고 다닌다. 비 오는 날씨에 반팔 반바지는 오히려 외국 사람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시기에 일어나는 온갖 부정적인 상황들을 필리핀 사람들은 '날씨 때문'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기에 필리핀에 있으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because of weather"인 듯하다.


날씨와 그 나라 사람들과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들었고,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동남아지역은 날씨가 계속 무더우니 느긋하고 무엇이든 천천히 움직이게 되고, 반대로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나 일본은 '이 계절이 끝나기 전에 이러저러한 일들을 끝내야지.' 해서 부지런하다는. 물론 날씨 말고도 역사적으로나 환경적인 많은 요인들이 있겠으나, 인간이 가장 쉽게 핑계를 댈 수 있는 것이 날씨임은 분명한가 보다.


날씨 때문이라며 오늘의 일을 내일로 슬쩍 미루는 필리핀 사람들이 한 편 귀엽기도 하다. 조금 더 열심히 일하면 훨씬 빨리 발전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이들보다 좀 더 발전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연 더 행복한가?아닌 것 같다. 우리는 깨끗하고 빠르고 정확한 나라에 살고 있지만 많은 사람이 불행하다. 누군가 그 장점들을 누리려면 다른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로켓만큼 빠르다는 배송을 선호하지 않는다. 가끔 이용을 하면서도, 나의 편함을 위해서 대신 고단할 누군가에게 미안하다.


가끔은 아이들의 준비물을 깜빡해서, 새벽까지 가져다준다는 배송시스템을 이용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웬만하면 여분의 것을 더 산다. 나처럼 깜빡한 엄마가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전날 밤에라도 알게 되었지만 내일 아침까지도 모르는 엄마가 있을 것 같아서다. 그래서 여유 있게 가방에 넣어주고 "준비물 안 가져온 친구들하고 나눠 쓰자." 한다.

그러면서도 가끔 생각한다. 아이들이 직접 준비물을 직접 준비할 수 있는 <학교 앞 문방구>가 있으면 참 좋겠다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학교 앞에 문구점이 없다. 그러다보니 크건 작건 준비물들을 엄마가 함께 챙길 일이 많다. 아침저녁으로 참새 방앗간처럼 들락거리던, 무뚝뚝하지만 정겨운 그 문구점과 떡볶이집이 그립다.


준비물을 챙겨가지 못해도 '이 집 엄마는 참 성의가 없네.'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친구와 좀 나누어 쓸 수 있는 정감 있던 학교가 그립다. 준비물 안 챙겨 온 벌로 교실 뒤에서 손을 들고 서 있던 십 분, 그중 절반의 시간은 옆에서 같이 벌을 서는 친구와 장난치던 그때. 알면서도 짐짓 모른 채 하시다가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들어가라. 내일은 준비물 잘 챙겨 오고." 하시던 선생님도. 그때 나는 분명히 행복했던 것 같은데.




날씨 이야기를 하다가 또 멀리 왔다. 이것이 내가 튜터들과 자꾸 수다를 떠는 이유이다. 오늘도 공부는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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