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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Mar 30. 2023

동굴이 필요해


나와 1호기, 2호기, 조카 4명이 한 방을 쓴 지 한 달이 되었다. 처음에는 파자마파티를 하는 것처럼 신났던 아이들이 조금씩 싸우기 시작한다.




나의 1호기는 12살이다.

조카도 12살.

이제 막 논리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나이. 사춘기에 발을 넣을까, 하다가도 어느새 <아직은 아이입니다만>, 하는 시기이다. 이 둘의 동거는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호기 아들은 마치 딸 같다. 감정이 예민하고 모든 일에 세심하여 주변을 잘 살피고 살뜰히 챙긴다. 눈치도 빨라서 공기의 흐름을 기가 막히게 눈치챈다. 덕분에 삐질 일도 많은가 보다. 조금 감정이 상하면 금세 얼굴에 드러난다. 문제가 생기면 긴 대화를 통해 그 상황이 이해가 되어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는 아이다.


조카는 전형적인(이런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특히 성별에 관해서라면 더더욱) 남자아이다. 상대방의 감정은 물론 본인 감정에 대해서도 큰 관심이 없다. 갈등 상황에서도 "미안" 하고 나면 끝이다. 길게 대화를 하면 혼이 저 멀리 달아난다. 짧고 간단명료한 단어로 귀에 꽉 박아주어야 이해한다.


둘은 어려서부터 성향도 체형도 참 달랐다. 그럼에도 잘 지냈다. 신기하게도.




에너지 넘치는 조카를 내가 잘 케어할 수 있을지 정하며 왔는데, 막상 와보니 둘 사이의 분위기가 날이 갈수록 심상치 않다. 특히 1호기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어둡다.

적색경보.


개인면담을 실시한다.

1호기는 예상대로 할 얘기가 많다. 이런 점이 불편하고, 이런 면이 꼴(!)보기 싫고... 모두 같이 지내는 상황 자체가 아이에게 스트레스가 되고 있었다.

조카는 뭐 그냥 다 괜찮다고 했다. 1호기는 이런 게 좀 불편하다는데, 했더니 "음, 그렇군" 하고 끝이다.


서로의 다른 성향과 상황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두 아이의 반응은 너무나 이해가 되는 바이다.

세심한 1호기는 아직도 엄마를 좋아한다. 엄마의 사랑을 동생과 반으로 나누어 가진 것만으로도 기가 찰 노릇인데 경쟁자가 한 명 더 늘었다. 게다가 엄마는 '너희 둘이 싸우면 너희가 알아서 해결해라. 나는 누구 편도 들지 않겠다'라고 처음부터 선언했으니.

조카는 부모님 없이 고모만 믿고 먼 타지까지 왔다. 그러니 매사 웬만하면 불화 없이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고 싶다. 실제로 많은 것을 양보하고(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지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예민하게 구는 1호기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제야 나는 아차 싶었다.

우리에게는 공간이 더 필요했구나. 비용이 조금 추가되더라도 말이다. 그건 나에게도 간절했다. 우당탕탕 정신없이 노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러고 나면 더욱 나만의 시간이 꼭 있어야 한다.

나를 꼭 닮은 1호기도 필요했던 것이다. 감정이 상하고 나면 콕 박혀서 생각을 정리할 혼자만의 동굴이.


<1호기와의 대화>

"1호기, 들어봐. 이곳은 한국의 우리 집이 아니잖아. 제일 편하게 지내려면 우리 집만 한 곳이 없어. 하지만 우리는 평소와는 다른 것들을 경험해 보려고 온 거야. 그 경험에는 좋은 것들도 많지만 불편한 것도 있어. 이곳에서 친절하고 재밌는 선생님들과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불편함은 감수해야 해.

세상에는 좋은 일들만 있을 수는 없단다.  우리가 엄청 멋있는 곳으로 여행을 갔다고 치자. 그곳까지 가는 동안 지루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할 거야. 그렇지만 그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나중에는 좋았던 기억이 훨씬 많을 거야.

나중에 이 시간을 돌아봤을 때, 너는 이곳의 좋은 것들을 많이 기억하겠지? 너는 늘 긍정적인 아이니까. 지금 불편한 감정들을 잘 받아들이는 것 또한 너한테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속상한 일은 언제든지 엄마랑 얘기해서 털어버리자. 알겠지?"


<조카와의 대화>

"조카야, 1호기가 너의 이런저런 한 면이 불편하대. 조금 조심해 줄 수 있어?"

"네."

"혹시 1호기한테 불편한 거 있니?"

"그닥?"

"그래, 혹시 생기면 언제든 고모한테 말해줘."

"네."






열흘 정도 지났을까?

밤에 농구를 하겠다고 나간 조카와 1호기가 어쩐지 땀이 하나도 나지 않은 채로 들어왔다. 조카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1호기가 소곤거린다. "엄마, 우리 얘기하고 왔어. 얘기하고 오니까 마음이 편해졌어." 그러고 보니 아이의 얼굴이 환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씻으러 들어가는 1호기. 씻고 나온 조카의 얼굴이 조금 피곤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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