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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Aug 29. 2023

06 어디로 갔을까 나의 로망은




오스트리아로 먼저 출발했던 남편과 취리히 역에서 감동의(!) 재회를 했다. 첫날 거대한 위용에 겁먹고 '비'라는 시련 속에서 방향을 못 찾아 헤매었던 취리히 역이었는데. 이제는 아이들도 트램과 버스길까지 구분하여 요리조리 잘 건너 다니며 "건널목 근처에서만 서 있어도 차가 다 멈춰주네! 여기 진짜 매너 최고야!" 외치게 됐다. 첫인상은 차가웠지만 차분하게 아이들의 첫 스위스가 되어 준 고마운 취리히를 떠나 이제 인터라켄으로 간다.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학회를 마치고 7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취리히로 온 남편의 얼굴이 수척하다. 하지만 며칠간 아빠에 목말랐던 아이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타지에서 지낸 며칠 동안의 수고로움이 이해되는 우리 부부는 그저 서로의 등을 몇 번 두드려준다.


엄마와 아이들만 있다가 아빠를 만나니 우리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내 마음의 짐을 나누어진 남편은 어깨가 더 무거워졌을까, 아니면 본인의 짐도 나에게 나누어주고 가벼워졌을까 모르겠다. 후자였으면 좋겠지만.




두 시간의 기차여행을 마치고 인터라켄 동역에 내리니 어스름한 저녁에 또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스위스에서는 모든 첫인사를 비로 하기로 약속한 걸까? 다행히 인터라켄 동역은 붐비지 않고 심플하다. 방향을 찾을 필요도 없이 5분만 캐리어를 끌고 가면 인터라켄 우리 집.


기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려는데 1호기가 두통을 호소한다. 약을 찾아 먹일 새도 없이 기차는 <인터라켄 ost> 역으로 들어섰다. 잠깐만 걸으면 돼, 얼른 가서 쉬자. 아이를 다독이며 어쩔  수 없이 제 몫의 캐리어를 손에 쥐어준다.

다들 지쳤다. 아빠는 오전 7시부터 하루종일 기차 이동을 했고, 아이들과 나는 마지막 취리히를 즐기느라 꽉 찬 오전 일정을 보내고 기차를 탔으니. 우산을 펼 기력도 없이 묵묵히 숙소를 향해 걸었다.


작고 정겨운 인터라켄 동역


아이들의 무거운 어깨에 내려앉은 비를 툭툭 털어주며 체크인을 했다. 유스호스텔인 만큼 전달 사항이 많다. '수건은 없고, 패드랑 이불커버도 직접 커버링 하고 회수해야 하며...' 이런 상황에서 늘 내 옆을 지켜주던 1호기는 로비의 소파에 힘없이 늘어져있다. 대신 내 옆에는 기나긴 직원의 설명을 함께 들어주고 있는 든든한 남편이 있다. 덕분에 나는 저녁으로 뭘 먹어야 가족들이 힘이 나려나 생각할 여유가 남아있다.


인터라켄의 우리 집은 2층. 사진으로 본 그대로인 정직한 방이다. 서둘러서 예약을 했음에도 워낙 인기가 많은 숙소라 화장실이 딸린 방은 이미 마감되었고, 그래도 우리 네 식구만  쓸 수 있는 4인실에 2층침대가 두 개 놓인 깨끗한 방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남편은 아이들이 쉴 수 있도록 재빨리 침대 패드를 깔아주고 캐리어를 쓰기 편한 자리에 착착 정리해 주었다. 다년간 함께 살며 남편은 함께 사는 여자가 원하는 것을 빨리 알아채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아이의 입에 진통제 한알을 얼른 넣어주고 우리의 식료품 가방을 스캔했다. 하루종일 기차에 시달리며 제대로 못 챙겨 먹은 남편을 위한 저녁 메뉴는 짬뽕국물과 김 주먹밥. 유스호스텔에는 제대로 된 조리기구는 없지만 (예전에는 취사장으로 쓴 것 같은) 큰 조리실에 전자레인지와 커피포트, 설거지를 할 수 있는 개수대와 음식물 쓰레기통까지 있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물가 비싼 스위스에서 간단한 레토르트 음식이나 라면 등으로 가볍게 한 끼를 해결하는 곳이었다.


쌀을 씻어 쿠커에 안치는 동안 눈썰미 좋은 남편은 1층에 음수대가 있는 것을 봤다며 얼른 물을 떠다 주었다. 속성으로 밥을 해서 지퍼백에 덜어두고, 다시 그 쿠커에 물 약간과 짬뽕분말 스프를 넣어 국물을 만들었다. 한 김 식힌 밥에 김가루와 마요네즈를 넣어 지퍼백을 마구 흔들어주면 밥도 완성. 20여분 만에 근사한 저녁이 준비되었다. -취사가 안 되는 곳이라서 작은 전기쿠커 하나로  최대한 간단하고 빠르게 준비한 후, 뒤처리도 깔끔하게 하였습니다!- 좀 뒹굴거리면서 컨디션이 조금 회복된 아이들을 불러다가 어미새마냥 주먹밥을 입에 넣어주니 쫑알쫑알 다시 말이 많아진다. 소량포장된 무말랭이도 큰맘 먹고 개봉했는데 아이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저 분말가루를 풀었을 뿐인 짬뽕국물을 먹으며 한식러버인 남편은 감탄한다. 당신 덕분에 스위스에서 이렇게 잘 먹는다며. 작은 일을 하고 큰 칭찬을 받으니 고단함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쿠커 하나만 닦으니 설거지도 끝. 마요네즈를 사러 마트에 뛰어갔다 온 남편이 센스 있게 낚아채 온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맥주를 홀짝거리며 잠시 멍. 계속 멍.

취리히에 놓고 온 것만 같던 정신이 이제야 따라붙은 것 같다.


숙소 사진을 찍을 겨를이 없던 우리. 홈페이지 사진과 똑같은 정직한 방이다.


그제야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깔끔한 방과 커다란 창밖의 젖은 풍경, 밥을 먹고 기력을 찾은 내 사람들의 편안한 얼굴. 며칠째 추워서 껴입었던 옷더미, 빨래를 해야겠구나. 그러고는 다시 멍.


유스호스텔이니 아이들에게 직접 이불 패드도 씌워보라고 해야지. 저녁준비도 아이들과 알콩달콩 같이하고, 설거지도 간단한 게임으로 정해서 하면 재미있겠다. 매일 일기도 써야지-라고 오기 전 계획했던 것들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무거운 짐에, 비 오는 날씨에, 부족한 체력. 모든 것에 KO 당한 느낌이다. 간절한 눈망울로 애교를 떠는 아이들에게 잠시 스마트폰을 허락하고 맥주를 홀짝거린다.  현실과 이렇게나 다른 기대였다니. 여기 서도 나는 무언가를 생산하여 식구들 배를 불려줘야 하고 빨래를 걱정하고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하는 거구나. 그렇구나.


허망하게 웃다가 남편을 바라보니 남은 기운을 다 써버린 것 같은 남편이 무념무상으로 따라 웃는다. 여보, 씻고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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