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적응에 드디어 성공한 2호기의 컨디션에 힘입어 오후에 다시 한번 주변 탐색을 나섰다. 만 하루동안 모든 교통과 박물관 이용을 할 수 있는 '취리히패스'를 사기 위해 역으로 갔다. 발권기계에서 직원의 도움을 받아 티켓을 구매하고 나서 자세히 보니 '교통'만 이용할 수 있는 '취리히교통패스'를 샀다. 어쩐지 좀 싸더라니. 티켓을 변경하려니 창구에서 줄을 서야 했다. 간단히 티켓을 사서 FIFA박물관에 가 보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카페에서 잘못 알아들은 이후로 또 한 번 실수다. 부족한 영어실력을 정보력으로 메꾸는 나인데, 제대로 아는 게 없으니 자꾸 실수를 한다. 엄마의 당황한 얼굴을 본 1호기는 어느새 엄마 옆에 착 붙으며 말한다. "엄마, 우리 같이 들어봐요." 1호기가 옆에서 힘을 실어 준 덕분에 티켓 변경을 무사히 마쳤다.
1호기는 초등2학년 때부터 작은 동네 영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웠다. 1학년 내내 엄마표 영어를 시도했지만, 영어실력도 은근과 끈기도 부족한 내가 먼저 포기를 선언했다. 아이가 다니는 학원은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을 삼 개월 간 쉐도잉(듣고 따라 하기)만 하는 곳이었다. 일 년에 고작 영화 네 편밖에 끝내지 못한다. 하지만 삼 개월 내내 한 영화만 파는 아이들은 툭 치면 대사가 나올 정도로 줄줄 외운다.영어유치원도 안 보내고 엄마표 영어도 실패했지만, 영어를 '공부'가 아닌 '말하고 듣기'로 시작하길 원했던 엄마의 선택이었다. 예전의 나처럼 영어를 공부하면 100% 실패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원의 유일한 숙제인 <하루에 30분간 자막 없이 영화 보기> 덕분에 아이들은 영화를 한글자막 없이 본다. '본다'는 것이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지만 장면과 소리로 대충 스토리를 만들어 어찌어찌 알아듣는 것 같았다. 함께 자막 없는 영화를 보다 보면 나는 늘 잠이 들지만(잘 못 알아들으니 재미가 없다), TV 보는 시간이 짧게 정해져 있는 우리 집 아이들은 숙제를 핑계로 (비록 영어로 나오지만 화면만은 현란하기에) 열심히 들여다본다.
이번 여행은 '아이들을 위한 여행'이라는 가면을 쓴, '엄마의 사심을 채우려는 여행' 임에 분명하다. 여행지 선정이 철저히 엄마 위주였던 것이 첫 번째 이유요, 아이들이 영어로 얼마나 대화가 되는지 알아보기 위한 <중간점검>이 그다음 이유라고나 할까.
이제부터 대놓고 엄마의 사심을 채워본다.
"엄마, 여기 초콜릿은 없어요?"
"엄마, 이거 얼마인지 안 적혀 있어요."
"빵은 여기 비닐에 담으라는 건가?"
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다.
"네가 가서 물어봐."
처음에는 쭈뼛거리던 아이들이 한두 번 가서 일을 해결하고 돌아온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친절하다. 웃으며 천천히 말해주고, 가끔은 앞장서서 도와주기도 한다. 모두 우리의 히어로들이다.
가끔 엄마는 장화 신은 고양이가 된다.
내가 잘 못 알아들은 상황이 되면 불쌍한 눈으로 아이들을 쳐다본다. 특히 1호기는 실제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엄마를 도와 여러 일들을 함께 해결했고, 구글지도 보는 법을 알고나서는 늘 앞장서서 길을 찾았다. 2호기와 장난치느라 정류소를 지나칠 뻔했을 때도 내릴 곳을 알려준 것은 1 호기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