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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Jun 28. 2023

04 여행 첫날 일어날 수 있는 일

엄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엄마, 맞게 가고 있는 거 맞아요?

엄마, 잘 알아들은 거 맞지?

엄마, 우리 어딘지 알고 가는 거야?


2호기가 심상치 않다.

여행을 오면 어른들도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하물며 아직 어린아이인데.


어제 취리히 우리 집에 처음 도착하여 간단히 저녁을 먹은 후 모두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다. "누가 제일 늦게까지 자는지 내기하자!" 생각보다 낡은 방 컨디션에 실망도 잠시, 씻지도 못하고 경쟁하듯 긴 잠이 들었다가 깨 보니 어느새 비도 그치고 맑아진 얼굴의 취리히가 방긋 웃는 것 같다.


첫 번째 문제 발생.

핸드폰을 충전하려고 보니 콘센트 모양이 우리와 다르다. 오스트리아에 먼저 도착한 남편은 바로 사용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스위스의 전기 코드는 뿔이 세 개다. 젠더를 분명히 챙겼는데? 남편의 캐리어에 안착한 모양이다. 이틀 후면 남편을 만날 텐데, 물가 비싼 스위스에서 어이없는 첫 쇼핑인가요? 가만, 저걸 어디서 산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셉션을 기웃거린다. "음.. 어.. 혹시 젠더 좀 빌릴 수 있을까?" 직원이 내 손에 들려진 핸드폰 충전기의 헤드 모양을 쓱 보고는 손을 뻗어 커다란 상자를 꺼낸다. 상자 가득 들어있는 젠더들 중에서 내 것과 꼭 맞는 것을 찾아 건네며 웃는다. "Wow~~" 유럽식 리액션으로 한껏 감사를 표해본다. 음.. 그런데 이거 나 이틀 써도 되니?  "Sure." 내가 만난 첫 번째 히어로다.


"엄마, 빌렸어??"

방 문을 여니 아이들이 반갑게 달려든다.

"응! 이제 아빠랑 전화할 수 있어!"

조식을 먹고 있다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상황보고를 한다. "여보, 젠더가 상자 가득이더라!" 나도 보고를 마친 후 아침을 먹기 위해 주부 모드로 전환한다.


두 번째 문제 발생.

아침에 나가 물을 두 통이나 사 왔는데, 탄산수다. 아, 알면서도 당한 탄산수의 역습이다. 잘 확인했어야 하는데! 일단 쿠커에 물을 끓여본다. 아침메뉴는 라면처럼 간편하게 끓이기만 하면 되는 떡국이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와, 엄마! 친구들은 이런 거 못해봤겠지? 누가 탄산수 떡국을 먹어봤겠어요! 우하하하" 특히 1호기가 한 건 제대로 잡았다. 필시 비행기에서 뽀로로를 가지고 놀린 것에 대한 복수렸다. 두고 보자 요놈.


의외로 맛있다는 탄산수 떡국을 먹고 슬슬 시내 구경에 나서기로 했다. 취리히 우리 집은 좀 낡았기는 해도 치는 소위 대박이다. 대충 방향을 파악하고 나서보니 정말 중앙역까지는 5분, 시내와도 바로 인접해 있어서 가볍게 산책을 나가본다. 예전에 여행 다니면서 음수대에서 물 받아 마셨다고  하니 둘 다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낸다.

"딱 봐도 그냥 분수인데요?"

"이거 먹으면 배 아플 것 같은데."

수질 검사 나온 직원 마냥 음수 적합 여부를 논의하고 있는 와중에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던 멋스러운 아기 엄마가 텀블러를 꺼내 물을 받으니, 아이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우와, 진짜 먹는 물이었어."

"짜식들, 엄마가 맞다고 했잖아."



스위스 시내 한복판에서 약수터 놀이를 즐긴 아이들과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빅토리 녹스에 가서 각자의 이름을 새긴 나이프를  사는데도 2호기의 표정이 뚱하다.

"2호기, 네 것도 살 거야! 골라봐."

"..네.. 그런데 엄마, 다리가 아픈데 잠깐만 앉을게요."



"우리 날씨도 추운데 따뜻한 핫초코 먹고 갈까? 엄마도 커피 한 잔 마시고."

길가의 한 카페로 들어갔다. 한쪽에는 먹음직스러운 빵들도 진열되어 있다.

"핫초코 있나요?"

"Yes, ~~~~~~"

긍정의 예스만 듣고 나는 주문을 시작했다. "그럼, 핫초코 두 개랑.. "하는데 주문을 받는 직원이 아까보다 큰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한다.

"테이블에 앉아있으면 주문을 받.아.준.다.고."

아, 오케이 오케이.

아이들과 밖으로 나와 어떤 테이블에 앉을까 물으니 2호기가 풀이 죽어 말한다.

"엄마, 나 다른 곳에 가서 먹을래요."

"응? 그래? 음.. 그러지 뭐."


터덜터덜 걷던 2호기가 묻는다.

"엄마, 어디로 가는지 알고 가는 거예요?"

신나게 이것 봐, 저것 봐, 하는 엄마가 불안한 모양이었다.

"응~ 엄마 알고 가지. 왜?"

"아니요, 뭐 그냥.."

세 번째 문제 발생.




1호기는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다. 먹는 것도, 하는 행동도 예민한 편이지만 꼼꼼하고 차분하다. 속이 깊어 가끔 엄마를 놀라게 한다. 그에 비해 2호기는 뭐든 덥석이다. 잘 먹고 잘 자고 씩씩하다. 어디서 굴러도 잘 살 것 같은데 의외로 계획이나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힘들어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에 비해'라는 네 글자이다. 둘이 굳이 비교하자면 좀 더 그런 편이라는 건데, 모지란 엄마는 늘 "첫 째는 이래, 둘째는 이래."라며 다 아는 척을 한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2호기의 상태가 심삼치 않다는 것을 인식한 이후로 엄마의 머리는 빠르게 굴러간다.

'아까 커피숍 직원 때문에 놀랐나?

'어제부터 내가 길을 잘 못 찾아서 걱정이 되나?'

'아빠의 부재가 불안한가?'




"아까 직원이 큰 소리로 말해서 놀랐어? 엄마가 한 번에 못 알아들었네. 여기 사람들 발음이 미국식이 아니어서 엄마가 못 알아들을 때도 많아.(응 미국영어라고  알아듣는 건 아니지만 일단) 하지만 엄마 여행 엄~청 많이 다녀봐서 경험으로(눈치로) 알게 되는 것도 많아서 여행 잘 다닐 수 있어.

그래도 영어 잘~해서 잘 알아듣고 친구도 많이 사귀면 더 좋은 여행이 되겠다. 그치?(기승전공부)"

"네.."

(이건 아닌가 보다. 작전변경! 아, 공부 얘기는 하지 말걸.)


"2호기, 이것 봐. 이게 구글 지도인데 여기 우리가 어디 있는지 표시되지? 우리가 이 강을 따라 이쪽으로 왔으니까 지금은 저쪽으로 걷고 있는 거야. 전 세계 어디서든 길을 잃을 걱정이 없지! 엄마 다 알고 다니는 거야!!"

"웅..."

(이것도 아닌가? 그렇다면..)


"얘들아, 아빠가 같이 오셨으면 너희 빅토리녹스 못 샀을 것 같지 않냐? 위험하다고 반대하셨을 걸? 그러니까 우리, 아빠 안 계실 때 하고 싶은 것 얼른 하자!(아빠 몰아 우리 한 편 되기 작전)"

"크크 맞아요. 아빠는 '아직 위험해, 그런 건 나중에 사자.' 하셨겠지." 1호기가 맞장구를 친다. 정작 타깃인 2호기는 묵묵부답.


잠깐 말없이 걷는 동안 보호자인 나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설마.. 아픈 건 아니겠지? 이곳 어디에 병원이 있을까, 가면 의사소통은 되려나? 이런 곳은 의료비도 비싸다는데...


둘째 아이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여름쯤부터 한 달에 한 번 열이 났다. 딱히 이유도 없었으나 날짜는 기가 막히게 꼭 한 달에 한 번이었다. 매 번 코로나가 아닐까 걱정했지만 아니었다.

대학 병원에 가도 원인이 없다고 했다. 대학병원 의사 선생님이 "원인을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는 말을 하셨을 정도니. 코로나 이후 비슷한 증상의 아이들이 많이 온다는 말에 그나마 위안을 얻고 돌아왔다. 우리 아이만 그런 건 아니구나. 한약도 먹여보고 운동도 시켜보았다. 이번 달에는 괜찮으려나 하는 기대를 매달 품으며 실망하고 또 이겨내고.


2년 가까이 달거리 같은 아이의 열을 함께 이겨내며

나는 역류성식도염과 이명, 불안 장애를 얻었다.

이유가 없이 아팠던 아이가, 이유가 없이 괜찮아진 지 몇 달 되지 않을 때라 덜컥 겁이 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며 슬쩍 이마의 온도를 재본다. 다행히 열은 없다. 딱히 목적지가 있었던 것도 아닌 터라 그저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 집 근처다. 회귀본능이란. 만 하루도 안되었는데 집 근처로 오니 마음이 푸근하다. "거봐, 엄마 집 잘 찾지?" 하며 괜히 너스레를 떨고는 작은 마트에 들러 아까 못 먹은 핫초코 대신 간식을 골라본다. 아이들은 한국과 비슷한 것, 다른 것을 열심히 탐색하다가 결국 비슷하지만 다르기도 한 음료를 골랐다. 모양이 예쁜 비스킷도 하나 사서 우리 집으로 간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우리 뒹굴거리자!" 하니 아이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각자 침대로 들어가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다. 2호기는 곧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네 시간을 내리 잤다... 그렇다, 2호기는 시차적응이 안 된 것이었다.  전 날 밤에 12시간 가까이 푹 잤기에 잠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계속 꿈나라인 2호기를 보며 엄마는 허무하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한다. 오후 시간을 가득 낮잠으로 채운 아이가 눈을 뜨더니 배시시 웃는다. 원래의 2호기로 돌아왔다.

서로 얼굴을 부빈다.



숙소는 낡았지만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마음에 든다. 아이가 잠든 네 시간동안 나는 마음껏 창밖을 바라본다. 아이들도 나도 가만가만 낯선 풍경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PS. 체크아웃 할 때 젠더를 챙겨 갖다줬어야 하는데, 마지막까지 충전을 한답시고 두었다가 깜빡하고 나와버렸다. 리셉션 서랍에 젠더가 왜 상자 가득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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