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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Aug 31. 2023

07 이제 울어도 괜찮아

동네 울보의 스위스 진출기



적당한 포만감에 살짝 더한 알코올의 몽롱함으로 지난밤 일찍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뒤척이는 아이들의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고는 살금살금 수건을 챙겨 공동 샤워실로 향했다. 우리 방은 공동 샤워실과 화장실 바로 앞에 있었는데, 불편할 줄만 알았던 외부 화장실이 사실 엄청나게 좋은 시스템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족여행이고 아이들이 아직은 어리다 보니 4명이 쓸 수 있는 패밀리룸 위주로 예약을 했다. 그러다 보니 여행 내내 화장실 하나의 단칸방 신세. 혼자 있을 공간이라면 화장실뿐인데 그마저도 작은 방 안에 있어 지나치게 밀접성이 좋았다. 먼저 화장실을 선점한 놈이 조금이라도 여유를 부리면 다른 한 놈은 엉덩이를 붙잡고 읍소하길 다반사.


그뿐인가. 혼자만의 시간을 유난히 즐기는 내가 새벽잠을 쪼개 혼자 아침 조식이라도 즐길라치면 세수하는 소리에 잠귀 밝은 1호기가 번쩍 눈을 뜬다.

"일..어 났어? 어.. 엄마 먼저 조식 먹고 있을게! 2호기랑 천천히 와, 천천히!!"




까치발로 방을 탈출하여 머리를 감고 있는데 노래가사를 흥얼거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눈치 보지 않고 소음을 발생시킬 수 있는 자유가 이렇게나 즐겁다니.

유스호스텔에는 한 층에 5칸 정도의 샤워실과 4칸의 화장실이 있었는데, 이상하리만치 이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 숙박예약은 일찌감치 마감이었는데. 다들 안 씻는 건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한산하고 깨끗한 샤워실과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으니 인터라켄 우리 집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직접 청소를 하지 않아도 늘 깨끗하다니, 이것은 정말 언빌리버블)


이것은 스의스의 흔한 화장실 풍경


다시 방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수건을 걸어두고, 핸드폰과 애착 미니키보드를 챙겨 조식당으로 향했다. 방금 시작한 조식당에는 아무도 없지만 감출 수 없는 싱싱한 활기가 넘친다. 평소 비루한 몸뚱이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빈 속에 마시는 아침커피의 행복을 버린 지 오래지만, 이곳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진한 커피 한잔을 가져와 한적한 자리에 앉아 커다란 창 밖을 바라본다. 행복수치가 수직상승한다. 핏줄의 끝까지 엔도르핀으로 가득 찬다. 온몸으로 행복하다.


가장 행복한 라테타임


취리히가 깨끗한 스위스의 도시 모습을 젠틀하게 소개했다면, 인터라켄은 압도적인 초록이다. 비록 구름과 안개에 가려진 모습이라도 그 거대한 존재감이 기운으로 느껴진달까. 여행을 다니다 보면 숨이 턱 막히는 자연에 인간은 그저 굴복할 수밖에 없는 한없이 미미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아 2초간 영혼이 정지한 상태. 나에게는 중국 윈난성의 호도협이 그랬고, 스위스가 그렇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실 동안 꼼짝없이 마음을 뺏겨 있다가, 리필한 커피를 앞에 두고야 겨우 키보드를 펼쳤다. 내게 주어진 자유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브런치를 열어 이번 유럽여행에 대한 기록을 남겨본다. 그러자면 출발 전 아팠던 엄마에 대한 이야기부터가 시작이다.

세 줄 쯤이나 썼을까, 목이 따끔하다. 자꾸 눈을 깜빡인다. 심장 깊숙한 곳에서 울컥, 무언가 꿈틀거린다. 더 이상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구석에 자리를 잡길 잘했다. 작은 동양 여자가 엉엉 우는 꼴을 여러 사람에게 들키지는 않을 것 같다. <엄마가 다시 건강하게 우리에게 돌아오고, 나는 가장 멋진 곳에 가서 펑펑 울어야지. 그전까지는 울지 않겠다.>고 꾹꾹 눌러 온 울음이었다. 엄마 앞에서도, 아빠 앞에서도 차마 울 수 없었다. 내가 울면 안 좋은 상황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어차피 해피엔딩 일 텐데 왜 울어? 하는 반항심이었다.


어쩌다 미친 X이 여기까지 왔을까, 누군가 봤으면 궁금했을 것 같다. 마치 이곳에서 엄마아빠에게 버림받은 아이처럼 격하게 울었다. 한참을 울고 겨우 눈을 뜨니 거짓말처럼 앞에 남편이 앉아있었다. '동네 울보가 잘 참는다'며 엄마의 병원에서 나를 놀리던 남편이었다. 2차 눈물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치정극으로 보겠네. 비련의 커플이라기엔 너무 늙었고, 불륜쯤으로 보이려나.


"어쨌든. 행복한 걸로."

2차전을 끝낸 나에게 남편은 말했다. 그새 말하는 법을 잊기라도 한 듯이 나는 더듬거리며 내가 우는 이유를 말했다.  반은 코 먹는 소리인 나의 앞뒤 없는 이야기를 남편은 그저 들어주었다. 점점 울음이 잦아들고 빨갛던 눈이 다시 멀쩡해졌을 때쯤, 1호기와 2호기가 해실하게 웃으며 나타났다.




진짜 여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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