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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Apr 03. 2024

민기 VS 밍키





예전에는 ‘남해’ 라는 지명이 그저 남쪽 바다인줄 알았다. 결혼 후 남편의 외할머니가 계신다는 남해마을에 가보고서야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구나,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곳은 독일마을 근처의 작은 동네다. 지대가 높은 할머니 댁 마당에서는 마늘밭이 층층이 내려다보인다. 그 오래된 작은 동네와 사랑에 빠진 나는 틈만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찾았다.


집성촌인 그 곳에서는 모두가 친척이거나 아는 사람이다. 지나는 걸음마다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다. 주로 연세 드신 분들만 옛 터전을 지키고 계시는 까닭에 아이들은 언제나 눈에 띈다. 우리는 뒷집 할머니 허락을 받고 산과 들에서 죽순과 마늘쫑을 뽑았다. 가마솥에 죽순을 삶는 동안 마당에서는 물총놀이가 한바탕 벌어진다. 씻고 나면 방금 밭에 있었던 나물들이 어느새 참기름 냄새를 풍기며 밥상 위에 올라와 있다. 아이들은 갓 지은 밥에 나물을 올려 맛있게 먹었다. 할머니는 “아이고, 아들이(아이들이) 야무지다. 마이 무라.” 하시며 웃으셨다.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동네에서 기르는 염소와도, 지나가는 길고양이와도 인사를 나누느라 우리의 산책은 언제나 발걸음이 더디다. 돌아오는 길에 옆집 할머니께서 빨래를 널고 계셔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갑자기 마당 한 켠에 묶인 커다란 개가 컹컹 짖는 바람에 아이들이 기겁을 했다. 물지 않는다는 말에 아빠 뒤로 숨었던 아이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었다. 큰 아이가 용기를 내어 묻는다.


“할머니, 이 개 이름이 뭐예요?”

“야 이름은 민기다, 민기.”

“아, 밍키.”

“그래, 민기.”


뜻밖의 오해에 남편과 나는 배꼽을 잡았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커다란 개가, 그것도 마당에 묶인 개가 신기할 뿐이다. 아파트 주변에는 ‘반려견’은 있어도 ‘집 지키는 개’는 없으니까. 얘는 왜 밖에 묶여있냐, 잠도 여기서 자냐, 춥지 않냐, 무엇을 먹냐는 둥 질문을 쏟아낸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웃는 이유를 모르시는 옆집 할머니는 꼬마들의 호기심에 열심히 대답을 해 주신 후 마당에 열린 앵두를 가지째 꺾어 아이들 손에 쥐어주셨다.


따먹은 앵두씨를 길가에 튀튀 뱉으며 ‘진짜 개 이름이 민기일까, 밍키일까’를 추측하던 우리는 그 날부터 밍키, 아니 민기와 친구가 되었다. 그 후 몇 번을 더 찾아갈 때마다 민기는 컹컹 짖으며 우리를 반겨주었고, 아이들은 여전히 “밍키야, 밍키야!.”하며 다정하게 그 이름을 불러주었다. 옆집 할머니는 우리가 갈 때마다 떡이며 옥수수를 손에 쥐어 주셨지만, 한번도 잘못 부르는 개의 이름을 고쳐주지는 않으셨다.




긴 겨울 후 봄이 되자 우리는 또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시할머니와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아이들의 성화에 밍키를 만나러 옆집으로 달려갔다. 어, 그런데 민기의 집이 비어있다. 안에 잡동사니들을 넣어둔 걸로 봐서는 잠깐의 부재는 아닌 듯 싶었다.

“할머니, 밍키 어디 있어요?”

“어, 느그 왔구나. 마이 컸네! 민기는.. 음.. 저어기 배 타러 갔다.”

“네? 개도 배를 탈 수 있어요?”

“어.. 뭐 그리 됐다. 고구마 묵을래?”

시골에서 키우던 개가 갑자기 배를 탔다니. 남편과 나는 무언가를 짐작하며 씁쓸히 웃었다.

“그럼 밍키는 언제 와요?”

“배 타러 갔으이 인자 안온다.”


실망한 아이들이 개 집 주변을 맴돌다가 고구마를 마다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밍키가 그곳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옆집 할머니 댁을 기웃거렸다. 벌써 몇 년 전 일이니 아이들은 이제 밍키를 잊었을 것이다. 우리가 갈 때마다 아이들을 보러 와주시던 동네 분들. 우리가 항상 사가는 카스텔라와 두유를 드시며 아이들 재롱에 좋아하시던 분들은 이제 하나 둘씩 배를 타러 가신 모양이다. 어느 순간부터 카스텔라가 상자 채로 남아서 줄지 않았다. “인자 빵 사오지 마라. 묵을 사람도 읎다.”하시는 할머니의 음성이 쓸쓸하다. 배를 타러 간 민기 혹은 밍키는 좋은 곳으로 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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