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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사이로 Jun 20. 2023

한갓진 여름날에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6월입니다. 저는 수풀집 주방에 앉아 주간보고를 쓰고 있어요.


엊그제는 여름이 이렇게 깊어진 줄도 모르고, 한낮에 텃밭일을 하다 혼쭐이 났습니다. 갑자기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더라고요. 더위를 먹은 거죠. 다행히 하룻밤 푹 쉬고 난 뒤 회복했습니다. 일요일인 오늘은 전국 곳곳에 폭염특보가 내렸다는 뉴스를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텃밭의 작물, 마당의 살림살이가 여전히 제 손길을 기다리지만, 해가 적당히 기울 때까지 기다렸다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제 정말, 깊은 여름입니다.


깊은 여름의 햇빛과 비, 바람에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며칠 만에 식물의 잎과 줄기를 무성하게 키워내는 힘이죠. 꽉 닫힌 꽃망울을 팡 터트리고, 손톱만 한 열매를 나날이 통통하게 키워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열매를 순식간에 다른 빛깔로 바꾸기도 하고요. 90여 일 동안 계속되는 아름다움의 근원은, 바로 그런 생명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시에 여름이 가진 그 힘을 두려워하고 걱정합니다. 전에 없이 큰 비가 내려 수풀집 주방이 물바다가 된 것도, 수풀집을 두르고 있는 돌담이 무너진 것도 여름이었습니다. 작은 고양이 '희망이'가 제 침실에서 고양이별로 떠난 것도, 비가 그친 여름날이었고요. 이치에 맞지 않는 존재, 쓰임을 다한 존재, 여린 존재들을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거두어 가는 힘. 그 힘은 특히 여름 안에서 힘이 세다는 걸, 작은 시골집 울타리 안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 아침, 마당 한쪽에 아기 두더지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다가가 확인해 보니, 이미 먼 곳으로 떠났더라고요. 화단 한쪽에 묻어주며 다시 여름의 한가운데로 들어왔음을 실감했습니다. 화단의 한쪽엔 겨우내 얼어 죽은 줄 알았던 선인장이, 노란 꽃을 피웠습니다. 이 여름 속 또 얼마나 많은 태어남과 자라남과 사라짐을 목격하게 될지, 얼마나 오래 그 기쁨과 슬픔 속에 머무르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과 슬픔은 언젠가 끝이 난다는 사실을 압니다. 언제 더웠냐는 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시작되면, 저는 또 여름을 한없이 그리워하게 될 거란 사실도요. 그러니 걱정하고 두려워하기보다 마음껏 사랑하려고 합니다. 한껏 소란하지만 더없이 눈부신 계절, 여름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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