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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사와동화 Jan 14. 2024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이꽃님 | 문학동네 | 192쪽 | 2023년 8월



첫사랑보다는 성장 이야기?     


지오와 찬이가 놓인 상황이 너무 처절해 분홍빛 기류는 조금 희미하다. 사랑이 아픈 거라면 사랑...특히 첫사랑...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졌다면 그것도 사랑...일까...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라는 이 매력적인 말을 절대 버릴 수 없다, 그런 느낌. 하지오가 유찬의 여름을 먹는 마지막 장면이 작위적으로 느껴져 조금 아쉬웠다.) 


유찬은 5년 전 화재사건으로 인해 가족 모두가 죽고 듣고 싶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속마음이 들리게 되었다. 하지오의 엄마는 미혼모다. 지오는 엄마를 지키기 위해 유도를 시작했을 정도로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가 병에 걸려서 들어본 적도 없는 낯선 아빠네 집이 있는 번영에서 살게 되었다.

유찬은 하지오와 가까이 있기만 하면 고요가 찾아온다. 이렇게 둘의 만남은 이어진다.     

하지오, 유찬 두 아이가 번갈아가며 자기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열일곱의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잘 풀어내었다.    


유찬_한낮의 무더위가 밤이 되니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소리만 들어도 나뭇잎이 얼마나 요란스레 바람에 흔들리는지 느낄 수 있다. 어디선가 풀벌레 울음 소리가 들려오고, 인적 끊긴 어둠 속 주황 불빛 아래 이 아이와 내가 서 있다.(42~43쪽)     


유찬_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렵지 않고, 다른 사람의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되는 이 평범한 순간이 얼마나 놀랍도록 평화로운지 다시금 깨닫는다.

“그럼 뭔데? 나더러 옆에 있어 달라는 사정이라는 게 뭐냐고.”

처음이다. 모든 걸 말하고 싶었던 건. 어쩐지 이 아이 앞에서는 솔직해져도 될 것만 같다.

“다른 사람한테는 안 들리는 소리가 들려.”

“뭐?”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 속마음이 들린다고.”(46쪽)     


하지오_비맞은 새끼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하던 녀석이 비 같은 건 맞은 적도 없다는 듯, 애초부터 고양이가 아니라 사냥 맹수였다는 듯 깔보는 저 말투며, 태도. 그 모든 게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49쪽)     


하지오_그깟 마음 좀 들린다고 다 아는 것처럼 굴지 마. 마음? 네가 들린다는 마음이 얼마나 가벼운 줄 알아? 사람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어. 하루는 조금 괜찮았다가, 그래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 이해해 보려고 했다가, 또 하루는 미칠 것처럼 화가 나 죽겠다고.(57쪽)     


유찬_궁금했었어. 그래서 듣고 싶었어, 네 속마음. 그 말 한마디에 지오는 주저앉아 버린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 목 놓아 운다. 가슴을 치며 발을 바닥에 비벼 대며 자꾸만 화가 난다고, 그래서 미치겠다고 그렇게 울어댄다. 나는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대신 그저 함께 앉아 있어 준다. 언젠가 내가 그랬을 때, 다른 누군가가 그래 주길 바랐던 것처럼.(58쪽)     


유찬_지오의 두 뺨에 슬픔이 묻어나고 고독이 눈가에 가득 고인다.(62쪽)


하지오_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매일같이 채워져 있던 믹스커피는 누군가의 마음이었나 보다. 마르지 않고 새어 나오고 또 새어 나오는 마음.

눈빛으로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다독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130쪽)     


유찬_톡톡, 바닥으로 떨어져 튕기는 빗방울과 물기를 머금고 푸르게 흔들리는 나뭇잎이, 이 아이를 향해 기울어진 우산이, 쏴아아 요란하게 내리는 빗소리가 마치 사진 속 한 장면처럼 하나하나 새겨지더니 비를 몰고 온 먹구름마저 환해진다. 그렇게 하지오, 이 아이는 비 오는 궂은 날마저 나에게 평안이 된다.(137쪽)     


하지오_“찬이는 지한테 소중한 뭔가가 생기면 또 잃어버릴까 봐 무서운 기다. 근데 나는, 잃어버리든 빼앗기든 소중한 게 하나 정도는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 잃어버리면 슬프겠지만 소중한 건 또 생기기 마련이다아이가. 소중한 게 평생 딱 하나뿐이겠나.”(148쪽)     


유찬_어쩌면 신이 내게 실수를 하고 미안하다는 의미로 저 아이를 보낸 것이 아닐까. 만약 그런 거라면, 신을 용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159쪽)     


하지오_놀라운 건 이런 거다. 내 온 마음을 다하는 순간부터 세상은 변하기 시작한다는 거. 그리고 나는 그걸 절대로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171쪽)     


하지오_나는 유찬의 가슴 언저리 위로 손을 가져다 대고는 동그란 공이라도 잡은 듯 손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그게 사과라도 된다는 듯 한 입 베어 먹는 시늉을 했다.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 방금 내가 네 여름 먹었잖아.”

“뭐?”

“네 가슴에서 자꾸만 널 괴롭히는 그 못되고 뜨거운 여름을 내가 콱 먹었다고. 이제 안 뜨거울 거야. 괴롭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을 거야. 두고 봐.”(186쪽)  


이꽃님의 작품들은 자신의 분위기가 있다. 십 대들의 풋풋한 마음과 그 마음 뒤에 숨겨진 쓰라린 감정들을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풀어낸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

죽이고 싶은 아이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


에 이어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색을 잘 유지해오고 있다.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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