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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혜정 Nov 08. 2024

피와 살(1)

삶의 의미를 찾아서

 누군가에게 충고할 때, 혹은 어려운 시기를 겪는 이를 다독일 때, '다 너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거야...'라는 말을 건네곤 합니다. 모든 경험 결국 '도움이 된다'라는 격려의 말이지요. 고난을 훌쩍 뛰어넘는 반전을 대하는 마음도 깔려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어로 '피와 살'은 'flesh and blood' 즉, '살과 피'라는 표현으로 사용니다. '피와 살', '살과 피'가 갖는 문자 그대로의 질감은 포근함, 보드라움과는 꽤 거리가 있습니다. 사실, 살짝 불편하기까지 니다. 날것의 본질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이미지 때문이지요. 개인적으로 '피와 살'이란 용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지혜로운 판결의 정수를 보여주는 고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입니다.




피와 살 in 베니스의 상인


 주인공 안토니오는 친구 바사니오를 위해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심장에서 가까운 1파운드의 살을 베어주기로 한다'는 사악한 계약 조건에 사인을 하고 돈을 빌립니다. 안타깝게도 상황은 비극으로 치닫지요. 상인 안토니오의 배가 선적물을 싣고 오다가 난파되었고 그는 모든 재산을 잃고 파산하게 됩니다. 돈을 갚을 수 없어 감옥에 갇히게 된 안토니오는 결국 재판정에 서게 되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이때, 재판관으로 변장한 바사니오의 아내 포샤가 번뜩이는 기지로 극에 반전을 더합니다. 솔로몬의 지혜와 같은 그녀의 명판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살은 베어가도 피는 한 방울도 흘리면 안 된다. "


최종판결을 언도하는 포샤, 프랭크 하워드


 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고 살을 벨 수는 없습니다. 생기 있는 살결은 살아 있는 피의 이동, 즉 원활한 혈액 순환의 결과이고요. 살과 피는 분리될 수 없는 몸의 주요 구성체입니다. 결국, 안토니오를 없애고 싶어 했던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그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패소하게 됩니다. 여기에 재산 몰수와 개종이라는 수모까지 겪 되지요. 사랑과 우정, 정의와 자비를 삶의 큰 줄기로 두르고 있는 <베니스의 상인>은 피와 살에 대한 화두를 던진, 후 안도의 결론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삶의 다양한 층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 in 성찬식



 '피와 살'이라는 용어의 등장은 성경의 신약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어요.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제자들과 만찬을 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날 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으셨을까요? 바로 다음날 자신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의 3년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부여잡을 말씀을 세우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노니.
(요 6:54-56)



 예수님은 제자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빵을 떼어 축복하시고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며 나누어 주셨습니다. 또한 포도주 잔을 들어 감사기도를 올린 후, '이것은 나의 피다.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고 마시게 하셨습니다. 혹자는 '뭐야,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하 놀라움 당혹스러움으로 혼란에 빠질지 모릅니다. 하지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들여다보는 것이 맞겠지요. 하루 뒤면 십자가 위에서 살이 찢겨 피를 쏟아 내실 예수님의 죽음이 깔려있습니다.


 현대 기독교의 성찬식은 여기서 유래됩니다. 성찬식이란 빵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며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을 다시 마음에 새기는 기독교 의식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죄 사함을 받게 됨을 믿는다는 의미이지요. 성찬식을 통해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는, 생명력 있는 삶의 통로는 바로 예수님임을 가르칩니다. 생의 마지막 날, 예수님은 그 중요한 비밀을, 죽음이 아닌 생명이라는 삶의 반전을  제자들에게 전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일 in 삶


 피와 살은 생명과 연결됩니다. 새로운 피를 만들고 새살이 차오르는 것은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이니까요.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심장이 뛰고 산소가 공급되는 상태일까요? 죽지 못해 살고, 뇌사의 상태에서 연명하는 것을 과연 죽음의 반대인 생명과 동가(同價)로 놓고 볼 수 있을까요?


 살아있음은 '생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생기란 싱싱하고 힘찬 기운(출처: 네이버 사전)을 말합니다. 독립운동에 대한 결의를 다지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던 단지혈서(斷指血書)의 주인공 안중근 의사는 생의 끝까지 타오르는 에너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삶의 의미였던 것이죠. 예수님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죽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죽음을 앞둔 최후의 만찬에서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힘 있게 생명을 살리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인생에 생기를 불어넣는, 살아있음의 근원은 바로 삶의 목적과 의미입니다.


  생기 있는 삶을 살아가고 계신가요? 반대로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며 터벅터벅, 꾸역꾸역 삶을 내딛고 계신가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아는 사람은 삶의 질과 결이 다릅니다. 삶의 알맹이인 그 '무엇'을 알 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일들이 모여듭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되는 것이지요. 인생은 영이 빠져나가면 흩날리는 재로 남겨질 육(肉)을 채우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단단하게 들어찰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나를 살리고 주변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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