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필사에 발을 들이고, 텍스트가 주는 의미와 울림에 감동하며 학생들과 함께 필사를 시작했다. 3년 전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리는 아련한 시간이다. 그때부터 내 아이와의 영어 필사도 꿈꿨다. 사심이 담긴 <하루 10분 영어 그림책 100일 필사>가 출간된 후, 아들에게 슬쩍 책을 디밀었다. 놀랍게도 흔쾌히 오케이 해준다. 100일간 아들이 엄마와 함께 영어 필사를 해주는 꿈이 시작되다니! 6월부터 시작되었던 여정이 10월 31일에 마침표를 찍었다. 공휴일, 주말을 빼고 장장 5개월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였다. 10월의 마지막 날, 할로윈이 아닌 영어 필사 완주 파티를 하게 되었다. 소박한 꿈이 이루어졌다.
"아들, 엄마 책으로 필사를 100일 동안이나 해줘서 고마워! 책거리해야겠다."
"책거리가 뭐예요?"
"책 한 권을 다 공부하고 난 후 파티하는 거지."
"어, 그럼 케이크 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들이 꿈에 그리던 <오리로보 종이접기> 책이 바다 건너에서 오고 있다. 선물에 케이크까지! 그래, 까짓것 이참에 케이크도 한 번 먹어보자! 아들의 100일을 격하게 토닥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영어 유치원 출신이 아닌 이상, 초등학교 2학년이 영어 텍스트를 읽고 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글로도 글씨 쓰는 것을 싫어하는 녀석을 데리고 알파벳을 100일 동안 쓰게 하는 과업이 처음에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해냈다.
아이와 영어 필사는 다음과 같이 진행했다.
1. 엄마가 영어 그림책을 읽어준다. 그림책이 없을 경우, 책에 실어둔 QR 코드를 타고 리드 어라우드 영상을 시청한다.
2. 책 전체 줄거리에 대해 요약하게 하고 이해도 확인과 감상 등을 나눈다.
3. 책에 실린 부분의 영어 텍스트 읽기 연습을 한다.
4. 읽기 연습이 끝나면 녹음을 한다. (매일의 날짜를 영어로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5. 가장 인상 깊은,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골라 영어로 필사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필사 텍스트 전문을 쓰도록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양을 덜어냈다. 쓰는 부담을 줄이고 영어 그림책을 읽는 연습에 더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아이의 생각을 영어로 표현하는 것을 자극하기 위해 녹음을 할 때,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고르고 이유도 말하도록 했다. 아이는 텍스트를 읽는 동안 한 문장을 즉석에서 선택한 후, 더듬더듬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매번 대답을 듣고 빵 터지곤 했다. 어른으로서 가지고 있던 틀이 깨지고 아이의 세계에서 노니는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저 귀엽고 예뻤다. 오늘은 어떤 문장을 골라 엄마에게 웃음을 안겨줄까 내심 기대와 궁금증을 가지며 즐겼다. 100일간 아이와 필사를 하며 누린 유익은 다음과 같다.
1. 아이의 영어 읽기 유창성이 늘었다. 필사책에 소개된 영어그림책뿐만 아니라 새로운 영어책을 읽는 힘이 확실히 생겨났다.
2. 특정 영역의 영어 말하기 패턴이 늘었다. 매일 년도, 월, 일, 요일을 말하고 녹음하다 하다 보니, 영어로 날짜를 말하는 법, 헤매지 않고 날짜를 서수로 바꿔 말하는 등 유창성이 늘었다. 또한 아이가 자주 쓰는 특정 영어구문 패턴을 알게 되었고, 이를 강화해 주거나 수정해 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3. 영어 문장 쓰기의 능숙도가 확연히 올랐다. 필사 첫날에는 단어 하나를 쓰는데도 엄마에게 알파벳을 하나하나 불러달라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본인이 혼자서 단어와 문장을 쭉 쓰는 독립성을 확보했다.
4. 무엇보다 아이의 엉뚱하고 기발한 생각들을 알게 되었다. 친구 이야기, 좋아하는 것, 감정선 등 읽기 녹음을 하는 동안 짧게나마 아이를 더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아들은 100일 간 필사를 마치고 나더니 대뜸 질문한다.
"엄마, 다음번에는 뭘로 필사해요?"
필사가 매일의 리추얼이 되다 보니 '다음'을 상기하게 된 모양이다. 준비되지 않은 답을 더듬거릴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글쎄, 이제 뭘로 할까... 매일 읽는 책들로 하나씩 할까? 아니면 엄마 책 다른 걸로 해볼까?"
아이가 할 만한 수준의 책이 될지 모르겠지만 어린 왕자를 해보겠단다. 초 2가 어린 왕자를 이해하기나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잘 모르겠지만 아이의 눈에 비친 어린 왕자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다. 어렵다고 중도하차해도 오케이다. 그럼, 11월다음 주부터는 어린 왕자와함께? 아들아, 고맙다. 엄마의 꿈을 이루어주고 또 지속해 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