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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 터널

극한 체험 후의 감사

by 위혜정

20여 년 전, 구찌 터널을 처음 방문했다. 협소하고 깜깜한 터널을 통과한 후 땀범벅이 된,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경험으로 기억된다. 미국을 상대로 그 좁은 터널에서 끈질기게 게릴라전을 벌였던 베트남의 전사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명제를 몸소 보여주었던 승리의 깃발에 대한 찬탄 보다 몸의 불편함과 체력적 부침이 먼저였다. 하지만 이번 호찌민행은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강렬한 민족애로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를 지켜낸 베트남 독립투사들에 대한 경의로움을 앞으로 두었다. 아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사심을 가득 싣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must-visit' 행선지로 구찌 터널을 꼽았다.




구찌 터널은 호찌민에서 북서쪽으로 40km 정도 떨어져 있다. 버스를 타고 장장 2시간을 들어가야 하는 거리를 견뎌야 한다. 아침 7시 30분부터 픽업 가이드를 기다려 단체 광광버스에 올라탔다. 호찌민의 관광 가이드는 입과 머리가 여간 바쁜 것이 아니다. 베트남의 역사, 문화, 정치 등을 사진까지 보여주며 프레젠테이션해 준다. 푸꾸옥의 가이드가 귀띔해 주었던 것처럼 휴양지와 다르게 호찌민에서 일하려면 다방면의 박식함으로 무장되어야 관광객을 만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끌었는지 툭 치면 입에서 자동으로 튀어나올듯한 장황한 지식을 쏟아낸다. 수업자의 관점에서 같은 수업을 매번 반복하는 수고로움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가이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우선, 베트콩(Viet Cong)이란 말은 지극히 미국 중심적인 용어라는 것. 멀쩡한 독립국가를 침략하여 자원을 갈취하려 했던 미국. 그 강대국에 맞서 싸운 베트남의 전사들은 단순히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었다(베트콩은 비하 발언으로도 사용됨).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지키는 '민족해방군(National Liberation Front) '. 마치 한국의 동해를 일본은 일본해(See of Japan)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처럼 제대로 된 용어의 인식과 사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구찌터널은 전투를 치르는 베트남인들에 최적화된 땅굴이다. 체구가 조그마한 베트남인들만 겨우 들어갈 수 있도록 좁게 파놓은 지하 터널인 셈이. 어딘가에 숨어있다 불쑥 나타나는 그들을 미국인들은 몹시 두려워했다고 한다. 최신식 무기들로 무장된 강대국에 맞서 베트콩들은 각종 부비트랩을 설치하여 미군의 전력에 타격을 가했다.



직접 구찌터널에 들어가 볼 수 있는 체험을 했다. 관광객들을 위해 실제 크기보다 1.3배 키워 놓은 사이즈의 땅굴임에도 불구하고 폐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입장할 수 없을 만큼 좁다. 깜깜하고 협소한 터널을 엎드려 엉금엉금 지나야 하는 여정에서 꼭 기억해야 할 점은 긴 바지를 착용해야 한다는 점! 그렇지 않으면 무릎이 다 까질 수 있다.




몸이 큰 아빠를 뒤이어 아들이, 그 뒤꽁무니를 바로 붙어서 내가, 끝없이 좁고 어두운 터널 속으로 입장했다. 앞서가는 거구의 미국인들이 내뱉는 "Oh, man! Shit" 등의 소리가 울림이 되어 땅굴을 꽉 채운다. 뒤따르는 사람들의 공포를 배가하는 적절한 배경음악이라고나 할까. 이 지하 세계에서 3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낸 베트남군들에 대해 존경심이 절로 든다.





곧이어 베트남에서 허락되는 총탄 사격장 체험으로 연결된다. 아들은 하고 싶다고 했으나 미성년자는 체험 불가인 규정 때문에 입이 댓 발 나온다. 남자아이라서 그런지 전쟁놀이를 좋아한다. 하고 싶은 데 못한다고 계속 삐져있다. 다른 관광객들을 기다리며 귀보호 장비(Ear protector)만 착용하다 나온 것이 여간 억울한 게 아니다. 나중에 커서 군대에 갈 때쯤 신나게 입대하려나.



해외여행의 묘미는 현지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점심 식사 시간에 구찌 터널에서 온갖 비명을 질러대던 덩치 큰 미국인들과 한 테이블에서 만났다. 그중 한 명은 베트남어를 상당 수준 구사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젊은 청년이었다. 그와 한참을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알고 보니 여행광이다. 호찌민과 하노이는 완전히 다른 도시이니 꼭 하노이를 가보라고 추천해 준다. 그리고 한국도 여행해보고 싶다길래 강추하며 민간 외교관 역할을 했다.







구찌터널은 한 번쯤은 경험해 보기 좋다. 남편은 학을 땠다. 덩치 큰 사람들의 애로사항이려니 한다. 관광 체험을 위해 1.3배 키워 놓은 곳이 그 정도면 원래 땅굴의 크기로는 외국인들이 절대 들어갈 수 없지 않았을까 싶다. 터널 체험을 하려면 긴 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착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반바지에 샌들 차림을 한 남편의 당부다.




지하 속에서 아들은 앞서가던 아빠가 어찌 될까 봐, 아빠는 아들이 잔뜩 겁을 먹을까 봐 서로 걱정하며 땅굴을 통과했다. 끝을 알리는 빛이 보였을 때의 안도, 밝은 지상 세계로의 귀환에 대한 벅차오름, 서로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등이 평소에는 당연했던 공간과 빛, 평화와 사랑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극한(?) 체험 뒤의 감사를 원한다면 구찌 땅굴 체험을 추천한다. 물론, 땅굴 체험은 원하는 사람만 선택적으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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