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저기 걷기
여행지에서는 스케줄을 꽉 채워야 돈 아깝지 않다는 생각들을 많이 한다. 특히나 도시 여행은 더 그렇다. 하지만, 이번 호찌민 여행은 여백의 시간을 늘렸다. 남편이 아프기도 했고 여기저기 도심 속을 걷기만 해도 동남아의 정취에 빠질 수 있는, 충분히 멋진 여정이었기에.
베트남 제일의 상업도시인 호찌민은 호 아저씨(Bac Ho)라고 불리는 베트남인들의 영웅, 호찌민 주석의 이름을 딴 도시다. 사이공에서 바뀐 이름이기도 하다. 자본의 유입으로 수도 하노이 보다 더 화려한 도시인 호찌민은 24개의 행정구역인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1군에서 24군까지 각각 나름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호텔은 3군에 위치했다. 공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가는 밤거리는 혼잡한 교통과 네온으로 인해 도시화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남편은 우스개 소리로 호찌민이 한국의 '수원' 정도 되는 것 같단다(중심지는 더 발달되었지만). 20여 년 전 호찌민 하면 도로를 마구잡이로 질주하는 오토바이가 떠오르곤 했는데 이제 자동차의 비율이 꽤 많아진 것 같다. 물론, 호찌민의 관광 상품으로 자리할 만큼 오토바이 트래픽은 여전히 상당하다.
3군은 관광객들이 몰려있는 1군 바로 옆 지역으로 여기저기 걸어 다니며 베트남의 신구식 빌딩들과 어우러진 열대 자연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택시 기사를 처음으로 만나 부자들이 사는 동네 1군과 3군이 도시 중심가라는 설명을 들었다. 문득, 오토바이의 비율이 20여 년 전과 차이가 있어 보이는 것은 여행 반경이 주로 1군과 3군이었기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임을 알아본 택시 기사는 7군에 한국인 학교가 있는데 준 인터내셔널 수준급이라는 귀띔까지 해준다.
3군은 한국만큼이나 한 블록 건너 카페가 붙어있을 정도로 커피숍이 많다. 스페셜티 커피숍, 커머셜 커피숍(스타벅스, 커피빈 등), 지역 커피숍, 로스터리 카페 등 커피 시장이 붐이다. 호찌민에 위치한 멋진 카페 투어가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을 정도다. 카페뿐만 아니라 크래프트 비어샵도 지천이다. 다양한 열대 과일류의 향미를 섞은 베트남 만의 맥주가 일품이다.
통일궁을 시작으로 벤탄 시장으로 걸어가는 길은 편안한 도보 가능 구역이다. 여러 번 이 길을 오가며 호찌민 도로의 특징을 발견했다. 신기하게도 2~3차선의 일방통행로가 많다. 도로가 넓지 않고, 신호등이 없는 가운데서도 나름의 질서로 차와 오토바이가 엉클어지지 않는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호찌민의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오토바이 대여소, 그리고 자동차 사이사이의 오토바이의 질주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훑고 지나가는 곳마다 초록빛 따스함이 스민 호찌민 거리는 화사함이 제대로 만개했다. 뚜렷한 행선지 없이, 정처 없는 발걸음을 충분히 정당사유로 치환하는 동남아의 이국적 전경, 그저 눈에 담기 바쁘다. 걷기만 해도 객의 느낌이 낯설지 않도록 완벽한 하나의 관광 상품이 되어준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무계획의 한적한 여정이 꽤 매력 있다.
벤탄 시장 근처에서 발견한 기념품숍에 불쑥 들어가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하나씩 들춰보기도 하고, 거리에서 만난 국제 도서 전시회에서 <죽고 싶어도 떡볶이는 먹고 싶어> 에세이의 번역본을 발견하는 기쁨도 누리고, 걷다 지쳐 힘든 다리를 위해 발마사지도 받아 보고, 뉘엿뉘엿 해질 무렵 맛있는 레스토랑을 찾아 몸의 원기를 충전하는 알찬 시간들이다.
'호찌민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관광 상품을 뒤지지 말자. 하루 이틀쯤은 그냥 거리로 나가 걷자. 바로 그 자리가 훌륭한 목적지가 되고, 추억을 남겨준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시간에 나를 맡기는 것, 강추하는 호찌민 여행 스타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