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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Aug 15. 2023

덜어낼수록 점점 더 커지는 것은?

다름아닌 구멍이다. (멍멍이 9마리 아님)

발라드랑 알앤비를 너무 들었나 마음이 말랑하다.

이럴 땐 마음을 식케이로 쇄신하면 된다.


지금 시간은 새벽 2시 30분. 7월의 마지막날이 코 앞이다.


방을 미리 치워놓길 잘했어. 언제든 내가 무언가 생각이 드는 즉시 앉아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으니까. 최근에 쓴 글들은 대부분 최근에 느낀 감정 순으로 위에 와 있도록 쓰여져 있다. 마치 불법 증축된 건물처럼. 이걸 내가 브런치던 어디던 올리거나 알리지 않고 계속 쓰다 보면 마치 구룡성채처럼 되겠지. 그 안에서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서 결국 나라는 사람이 쓴 한 명의 집필자이자 편집자이지만 시시각각 취향과 입맛이 변하는 까다로운 인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의 생각과 마음, 더 나아가서는 다짐이 마치 여름날 아스팔트 위 떨어뜨린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고, 더워진 차 안에서 식고 맛없어져 버린 커피처럼 그저 갓길에 쏟아부어져 버린다.

그나마 나은 것은 손소독제나 일회용 알콜스왑 정도. 습기는 금방 사라지고 뻑뻑한 표면이 남는다. 그들이 사라지기 전에 담아놓아야 한다.


내 마음이 새벽 2시 30분의 마음과 같이 안정적이길. 그래서 그냥 아기 강아지가 뛰어다니는 영상이나 보면서 잠들어 내일의 아침과 낮, 그리고 숱한 어려움들에 의연하고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길 바란다.

내가 그런 하루를 지었던 적이 얼마나 되며 그런 축조기술이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안정적이길. 부디 흔들림이 없는 자아가 내일을 지배하길 바랐다.


그리고 또한 가을이 오길 바랐다. 그래야 더위가 나의 정수리를 덮치지 않고, 많은 땀들이 범벅이 되고 해야 할 고민도 숱한 샤워에 씻겨 내려가지 않길. 선선한 바람에 내가 물에 푹 적셔온 걱정이 쾌적하게 마를 수 있는 날씨이길 바랐다.


내가 이 짧은 글을 대충 써놓고 난 시간은 37분쯤. 생각이 활어회나 다름없다. 깨끗한 도마와 날이 잘 선 칼로 빠르게 잡아 쟁반 위에 올리지 않으면 내일모레쯤엔 그저 썩은 생선이 될 뿐이니까. 정신은 더럽고 마음은 무디다. 두개골 속에서 썩은 생선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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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비참하고 보잘것없는 모습. 그 상태를 인정해야만 비로소 발전이 시작되었다. 인정까지 도달하는 과정의 길가엔 뜨거운 피가 흩뿌려졌다. 인정하는 것은 아픈 것이고 직후 자존심마저 만신창이로 만들어야만 레이스가 시작되는데 이것을 발전이라고 부르는 듯하였다.


그 생각들을 하노라면 너희가 너무너무 밉다. 미운 감정을 넘어 싫고 싫어 혐오가 인다.

이것이 정확히 어느 정도 농도의 열등감인지 투명하고 순수한 혐오인지 측량해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실재하는 열등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뛰어다녔고 발버둥은 종종 예상가능한, 혹은 발견되었을 때 반가울 족적을 남겼으니까.

이 혐오가 타당한지에 다한 개인적인 이유를 찾아야 했다. 타당한 혐오가 있는가?라는 시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 미워함은 어디를 기원으로 하는가. 되도록이면 가까운 곳에서 탓할 거리를 찾아내고 싶어 주위를 되짚어보면 손끝에 몇 가지가 걸려 아귀에 들어왔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네모로 재단된 나의 창엔 네모 풍경이. 동그라미로 재단된 너의 창에는 동그란 풍경이 보이는 까닭일까?

하지만 나는 대부분 옆으로 네모의 시간들을 보낼 것이라면 위로 늘려 보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아이맥스 화면이 됐으면 했다.

혐오조차 아름다움을 갖출 수 있음을 받아들인 후였기에.


남의 불행을 비는 마음은 잘못된 걸까? 도통 알 수가 없다. 어떤 집단은 복수를 위해 존재하기도 하는데 심지어 멋있다. 이름도 복수자들인데 어째 개인의 사적제재는 마음만 먹어도 고운 시선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 나의 사리분별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온도는 영하 273도 정도.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감정은 그보다 차가웠다. 이미 차갑다,라는 말이 의미 없는. 어찌 보면 얼어붙은 채로 불타오르고 있는 무언가였다.


알지 않아도 좋을 일들은 많으나 인간이 어찌 가십에 대한 흥미를 모른 체 할 수 있을지.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랑받으며 이어져왔던 매체들의 장점을 여실히 느끼는 여름이다.

신문과 TV가 진짜 정보를 담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편안하던 불편하던 검열적은 적나라한 사실은 인터넷 속에 있다고 지금도 생각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신문과 TV는 고요히 검증된 것들을 전하고 있다.

검증과 진리는 심리적 서열이 있는 단어이나 그들은 소음과 함께 오지는 않았다. 간결한 전달로 소화를 쉽게 했다.

마치 어릴 적 학교 선생님이 퇴근하는 모습을 보는 느낌? 보다 심화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현실과 역할의 갭에서 오는 묘한 이질감이 나에게는 불호, 즉 싫어함으로 정의되었다. 나는 그냥 교단에 있는 이가 사람이 아니라 학교에서 선생의 롤을 수행하는 기계였으면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바람의 메커니즘이 내 의지나 열정이 만원 지하철과 무더위, 혹은 매서운 추위에 꺾이는 참 보잘것없고 볼품없는 불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했다.

더위에 취약하면 시원한 환경을 찾아가고 추위에 약하다면 비니를 하나 더 뒤집어쓸 노릇인데 더우나 추우나 식은땀처럼 흐르는 이 피로를 나는 다룰 재간이 없다.


바위도 깃털도 모두 중력을 이기지 못함은 같은데도 오히려 저 깊은 심연이 내가 가야 할 길인데도. 나는 갓 탈락한 깃털처럼 아직 모체가 가졌던 방수기능을 뽐내기라도 하듯 물 위에 떠 흘러간다.

빠져서 온전히 젖지 못하는 나에게서 풋내가 나는 것만 같아 둘러보면 선함을 위시하며 이상항 술수를 뿌리는 것만 같은 저들이 눈에 띈다. 그들은 물에 반쯤 잠겨서 물속의 장점을 설파하지만 왜 뭍에 자기 귀중품을 다 보관해 둔 것인지는 설명 못할 테다.

잘잘못을 따지는 행위 자체에 오류가 있고 각자의 생김새를 존중하고, 이러쿵저러쿵, 누가 모르나? 난 그게 안 되는 인간이니 나를 합리의 운전석에 앉히고 풀악셀을 밟아 밀어버리겠다는 말이다.


내가 정말로 꺼리고 혐오하는 것의 실체는 방식의 실패나 방법론적 부정에 가깝다.

의견을 모아 중론을 도출해 나름의 입맛에 맞춰 더 발전된 방식으로 삶에 적용하는 루틴은 한계를 맞이하게 되어있고 나는 그것이 당장 내일일까 두렵다.

오히려 다들 차를 타고 배를 몰아 내가 선 이곳으로부터 시시각각 멀어질 때,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내 다리마저 부러뜨리고 잘라가 움직이지 못할 때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슬쩍 든다.

아무런 엄두도 못 낼 시기가 지금보다 덜 두려웠다는 얘기다. 가능성이 두려움을 만들어 가만히 존재하는 그들에 대한 공격성으로 발현되었다고 생각하면 심히 본인의 그릇에 대한 회의가 커진다. 하지만 마른나무와 불쏘시개가 쌓여있다고 해서 그들만으로 발화를 이룰 순 없는 노릇인 것은 저명하다.


상호작용들을 이야기했지만 좋은 토양과 관리 안에서도 뿌리가 썩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가 바로 내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가능성이 오늘도 베개에 바늘을 수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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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날짜를 매기는 일이 의미가 없는 시기였다. 아무래도 좋다. 현재의 감정은 남겨지고 미래의 나는 부끄러워할 뿐이다. 지금의 내가 23살을 읊는다면 부끄러울 것이고 반대로 스물셋의 말을 지금 한다면 그것 또한 착오가 있는 일일테다.

아이패드 키보드를 성나서 두드리는 오늘의 내가 스물여덟의 나로 적히고 기억될 터, 앞자리가 3이 될 미래의 내 눈에는 그 또한 부끄러움일 테다.


매일 올라타는 지하철의 호선이 달라지고 내려서 길을 걷는 사람들의 결이 달라져도 나의 본질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감정적인 사람. 변화를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사람. 때문에 또다시 견디는 일의 시작을 대비해야 한다. 흐린 눈을 하고 무릎에 힘을 빼 걷는 식으로 나는 고단한 시기를 버텨왔다. 비니를 눈꺼풀 위까지 덮어쓰고 목이 높은 외투로 볼을 감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되어 근태를 위해 노력했다.


계획이 없는 게 나았다. 나는 계획을 세우는 걸 좋아하지도 더군다나 J도 아니었지만 계획대로 실행되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은 늘 나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이루어지지 못한 계획이라도 괜찮았다. 그저 성취던 소실이던 부끄럽지만 그걸로 나의 본질은 지켜질 따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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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욕심이 경로에 흩뿌려졌다. 이럴 거면 차라리 스프링클러를 설치할걸. 균일하게 뿌려진 욕심이 차라리 나았겠다. 의도대로 뿌려졌으나 군데군데 뭉쳐진 욕심이 화를 만들고 있음을 알았다.


예술품은 미학적 경험의 유무에 따라 나뉜다. 그렇다면 내가 판단하는 좋은 사람은 나에게 어떤 경험을 주어야 타이틀을 획득하게 되는 것일까?

시작이 나빠도 끝이 좋으면 좋은 일로 기억된단다. 그 의견은 많은 질타의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누구는 언제나 나빴네, 끝이 좋아봤자 뭐가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수많은 네거티브를 받겠지만 나는 동의한다. 나가기 싫은 약속의 귀가가 행복하다면 그 일은 행복했던 일이 될 것이므로.


오히려 무용하기에 값지다. 꽃이 그랬고 수많은 편집샵에 들어찬 물건들이 그랬다. 어쩌면 인간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용도 폐기가 된 사람들이 모여 어떠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사랑이나 행복 따위의 총량이 지금보다 훨씬 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대척하고 있는 욕심과 무용이라는 단어가 서로를 보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용한 것을 탐내는 마음과 욕심을 채우고 나서야 오는 무용감에 관한 것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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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안고 끙끙대며 고민을 마치고 나면 그닥 좋지도 않은 아이디어와 구상들이 종이와 아이패드 안에 들어차있었다.

이런 게 아닌데 하면서도 관성에 의해서 뚱딴지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던 생각은 멈추려는 각고의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다음 역까지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는 멈춘다는 확신이 있음에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에 소모적인 경유지가 많다.

직선으로 선을 그어놓으면 걸어서도 갈 거린데 나는 가장 거대하고 연료가 많이 쓰이는 수단을 선택해 탑승했다.

시간과 하릴없이 쓰인 마음들을 모르 척하고 그저 수단이 안락해서 좋구나 하며 머릴 기댔다.


알면 알수록 이상해지는 관계들이 있다. 이 사람이 어디 사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 보다는 좀 더 무거운 것들을 하나 둘 아는 순간 선반이 더 필요해진다.

하지만 나는 이 집을 렌트할 때 벽에 못을 박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분명히 숙지했고 집주인과의 약속, 아니 사람들과의 약속을 나는 제법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때문에 나는 선반을 달지 않기로 선택했으며 그 선택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형형색색과 중구난방의 형태를 가진 박스탑을 만들어냈다. 누가 언제 가져다준 건지도 모르는 상자가 많았다.

어디 무엇을 넣어놨는지 누가 다 기억하겠느냐만은 당장 내 코트 안주머니에 소분한 향수와 누가 선물했었는지 잊은 지갑이 있는가 수시로 확인하는 나에게는 그런 타입의 망각은 조금은 두려운 일이다. 필요할 때 없지만 존재하는 것은 무용한 지 유용한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용에도 가치를 놓아보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무언가를 배울 때 하는 루틴대로 따라 하고 능숙한 이들의 생각을 답습했다.

꽃은 아름다울 뿐. 그 아름다움이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면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꽃은 무용의 선반에 놓였다. 바뀌지 않는 것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젊음의 뒤에 서 있다 이젠 어깨를 맞추며 걷는 나의 편견이다.

내가 지금 함께 걷는 이를 앞지르는 날 나는 바뀌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배척을 무겁게 올려둘 테다. 편견은 강화될 뿐. 5인승 자동차에는 5명이 타야 안전하고 3명 정도 타면 쾌적하다는 걸 설명하지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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