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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동 Oct 28. 2023

이삐와 수피아와 함께한 시간들 1

경주 황리단길


"시간 나면 보자."

"시간 내서 보자."

"언제 한번 식사해요."


못 만난다는 얘기다.  못 본다는 얘기다.

그리고 정중하게 너를 거절하는 인사성 멘트이기도 하다.


고미숙 저자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를 통해,

약속은 그저 흘리듯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사주팔자야 태생부터 정해진다지만, 생긴 대로 사는 대로만 살다 보면 '답게'사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나답게, 어른답게, 사람답게...


긴 직장생활 속 작은 여지 하나라도 남겨 거대 집단 속 교집합에 속하려 애쓰던 때가 있었다.

대충 걸쳐진 얇팍한 관계의 끈은 지속되거나 오래가지 못한다. 끝은 늘 허무함과 약간의 배신감이 남는다.


그래서 애초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2023년의 가을.

동생 이삐와 경주에서 시간을 약속했었다.

언제쯤 보자 애벌 약속만 해둔 터였는데

 지기인 수피아와 마침 맞아 떨어진 시간에 함께 하게 됐다.

번개 같은 약속이 정해졌다.


경주 황리단길로 간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두 방울씩 비가 시작된다.

우산은 하나고 갑자기 내리는 비에 편의점 비닐 우산도 동났다. 우산 하나를 두고 셋이 딱 섰다.

"자, 일단 머리만 넣어. 머리만."


상상해 보시라.

말만한 여자 셋이 머리  맞대고 우산에 질질 끌려가는 모습이란...


저기요. 내 동생이거든요. 둘이 정답게 걷는다. 조막조막하니 도토리 둘 걸어간다. 도토리라고 했다고 동시에 째진 눈 네개가 날 째려보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정말이지 옷이 함빡 젖었다.

슬슬 한기 들기 시작한다. 어디든 비 피할 곳이 필요했다. 문전성시 카페 3곳에서 퇴짜 맞고 한 군데 딱 한 테이블 빈 곳을 발견했다.


낮술의 매력. 짭짜리한 프레즐과 처음 마셔보는 낯선 맥주의 맛이란... 운전하느라 발효차로 입맛 다시던 수피아 모습에 그 주 주말은 또 한잔 해버렸군.


수피아는 오후 출근으로 차 한잔 후 아쉽게 헤어졌다.

이삐와 같은 내 시스터. 다음을 기약하며 고이 보냈다.





제일 먼저 한복. 


올망졸망 뛰는 아이들 머리도 빗기고 아얌 씌우고 댕기 들여 색동보다 더 이쁘게 한복 입혀 줬었지.

오늘은 아이들 말고. 우리.


"근데... 우리가 제일 늙은 사람들 같다.", "아니다. 저 앞에 하얀 머리도 있다."


줄이 줄이...

소문난 닭강정도 경주 명물 쫀디기도 긴 줄 앞에 항복했다.



운 좋게 겨우 십원빵은 하나 사먹었다. 치즈가 쭉 늘어나 폭폭한 빵과 어우려져 맛나게 먹을 수 있었다.


온갖 곳 다 구경 다녔다. 공예품 파는 곳과 독립책방 한 곳도 지났다. 인증샷에 방해가 되니 비켜 달라는 부탁이 제일 많았다. 찍는 게 아니라 보는 곳인데...


대부분의 가게는 오후 브레이크 타임이 있었다.

5시 이전엔 카페가 붐비고 이후엔 식당과 주점이 붐빈다.


한복을 반납하고 주린 배를 채우러 가본다.


해지는 저녁. 오늘 하루도 고마웠구먼. 딱히 해준것도 없는데 이토록 멋진 풍경을 선물해 주고 말일세. 지는 노을도 한잔 하게.


파전 한 장, 꼬막 무침에 동동주 한 되로 저녁 잇는다.

자매 인생 술이 된 동동주, 막걸리에 경주의 밤은 깊어갔다.




맹렬한 더위가 가시고

아침저녁 찬기운 드니 괜히 마음도 서늘해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고 이삐 역시 센티한 기분에 마음 어지럽던 찰나였단다.


신나게 웃었고

예쁘게 입고 즐겼고

맛있게 먹었다.


지치고 힘에 부치면 가끔 쉬자.

명랑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쉬며 먹고 웃다 보면

괜찮은 시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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