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졸업 파티 이후 남은 한 달의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선생님과 헤어져야 하는 날이 점점 다가왔다. 딸보다도 내가 더 울 것 같았다. ‘울지 않고 웃으면서 헤어져야지.’라며 하루에도 수십 번 다짐했다. 유치원 등원은 7월 말까지였지만 방학은 6월 중순부터 시작됐다. 형, 누나가 있는 유치원 졸업생 중 몇몇은 이미 떠났고 오늘은 딸의 옆자리 페페가 떠나는 날이었다. 페페에게는 누나가 있다. 누나 역시 같은 유치원을 다니다 작년에 학교에 입학했다. 누나가 학교 방학을 하며 페페는 유치원을 떠나게 됐다. 유치원에 들어서는 페페는 슬픈 표정이었다. 딸은 친구의 슬픔을 느낀 듯 등을 쓰다듬었다.
나란히 손을 씻으러 갔다가 사이좋게 교실로 향했다. 페페 아빠 손에는 파티를 위한 머핀과 아이들에게 줄 선물로 가득했다. ‘나도 곧 준비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울컥했다. 머핀과 선물을 전해주고 돌아서 나오는 페페 아빠의 눈시울이 붉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페페는 마지막 날인가요?” “네, 작년 첫째 딸이 유치원을 떠날 때 둘째 아들은 아직 1년 남았다는 생각에 덜 슬펐는데 둘째 아들마저 떠나게 되니 슬프네요.”라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항상 밝은 모습만 봐왔던 터라 얼마나 슬픈지 느껴졌다.
“모든 일이 잘되길 바라며 건강하세요. 페페 엄마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감사합니다. 00도 학교에 가죠 “ “네, 저도 슬픔을 잘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라며 애써 웃었다. 주차해 놓은 자동차까지 걸어오는 단 몇 분이 길게 느껴졌다. 유치원 원장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들과 잘 헤어질 수 있을까? 특별한 딸
‘다운천사’ 선생님들이기에 더 각별하고 애틋했다.
선생님들은 딸을 사랑으로 돌봤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며 성장해 갈 수 있게 도왔다. 협력 육아라 할 정도로 서로 소통하며 딸을 키워냈다. 딸이 혼자 퍼즐을 맞출 수 있게 집에서도 유치원에서도 연습시켰다. 화장실 가는 것 또한 집에서도 유치원에서도 갈 수 있게 도왔다. 언어치료 선생님에게 배운 새로운 단어를 공유하며 유치원에서도 집에서도 똑같이 가르쳤다. 그동안 가르쳤던 단어를 딸이 처음 말하게 되면 서로 기뻐했다. 두 아들 때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두 아들은 평범했기에 선생님과 소통이 적었다. 헤어질 때 아쉬움은 있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딸의 선생님 한 명 한 명을 떠올리며 마지막 선물을 준비했다. 딸이 그린 그림에 사진을 오려 붙였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손 편지를 썼다. 한국 전통 모양이 들어간 책갈피와, 동전 지갑을 포장했다. 더딘 딸의 성장을 이해해 주며 함께 해주었던 친구들에게도 선물을 준비했다. 한 아름 안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딸의 마지막 등원을 위해 선생님들은 정성껏 파티를 준비해 주었다. 오색 풍선이 교실 안을 가득 채웠다. 딸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신났다.
하원 시간이 되어 남편과 함께 딸을 데리러 갔다. 딸이 유치원에서 쓰던 짐 꾸러미가 문 앞에 나와 있었다. 텅 비어버린 딸의 자리가 낯설었다. 선생님들이 헹가래를 하듯 딸을 들어 올려 부모 품으로 안겨주었다. 미끄러지듯 모든 일이 잘 되길 바라는 뜻이었다. 눈물이 곧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선생님 한 명 한 명 허그하는데 한 선생님이 울음을 터트렸다. 결국 모두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헤어짐을 잘 모르는 딸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남편의 토닥임에 진정시킬 수 있었다. 딸이 제일 좋아하는 라우라 선생님이 “00 덕분에 우리가 더 행복했어. 사랑스럽고 예쁜 00을 잊지 못할 거야. 학교에 가서도 잘 해낼 거라 믿어 언제나 응원해. “라며 딸을 꼭 안아주었다. 딸은 그제야 마지막임을 이해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선생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떨어지기 싫은 아기 코알라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겨우 달래며 데리고 나오는데 실감 나지 않았다. 매일 그랬듯 내일도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주러 올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지나갔다. ‘이제 이곳에 올 일이 없겠구나.’ 유치원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난 그곳을 마음에 눌러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