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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kki Mar 20. 2019

겹쳐진 100년의 발자국, 서울

경성모던타임스 / 2014 기록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 비록 저 멀리 지방에서 서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고 올라온 사람도 아니지만 ‘서울’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기분은 항상 내게 존재했다. 


학창 시절 때부터 역마살이 낀 사람 마냥 서울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데 온 총력을 다 했었다. 요즘 들어서 가장 서울에서 ‘꽂히는’ 곳은 다름 아닌 종로, 특히나 종각을 중심으로 <경성 모던 타임스(2014년, 박윤석 저)>의 맨 앞 지도 부분에 나오는 곳이다. 북촌의 한옥마을과 삼청동, 인사동, 낙원동 등 옛 조선의 궁들을 중심으로 지어진 곳이다. 


1920년 경성. <출처=핀터레스트>


일전에 한옥에서 생활하는 것은 어떨까 체험하고 싶어, 한옥 게스트하우스에 하루 묵은 적이 있다. 한옥마을이 형성되어있는 계동에 위치한 집이었다. 넉살 좋은 주인은 북촌의 형성 기원을 대청마루에 앉아 한참을 설명해주었다. 


 “이쪽은 아시겠지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곳이에요. 조선시대 때부터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만들어놓은 길이기 때문에 현대적으로 계획되고 포장된 도로와는 조금 다릅니다. 백 년이 넘은 역사가 그냥 이 거리에 쌓여있다고 보면 돼요. 옆에 궁들은 역사적으로 보호해 놓는다고 사실상 사람들이 살지 않잖아요. 근데 이 구역은 사람들이 예전부터 계속 살던 곳이거든요. 저쪽은 상인들이 많이 살았고, 또 저기는…”


주인의 끝도 없는 설명은 한 시간 가까이 이루어졌다. 그 후 나와 내 친구는 북촌의 거리 사이사이와 창덕궁, 삼청동, 인사동을 걸어 다녔다. 골목은 좁았으며 꼬불꼬불 사이 길도 많았다. 한옥들뿐만 아니라 일제 당시 서양식 건축 양상을 갖추고 있는 중앙고등학교와 같은 건물의 멋스러움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말 많은 주인의 말처럼 종각 거리거리에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는 듯하다.     


‘경성 모던 타임스’를 북촌 방문 후 읽으니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한림이 걸었던 그 거리를 다시금 내가 밟고 또 이후에 누군가 밟을 것이라 생각하니 새삼 한 나라의 수도의 역사가 얼마나 긴 건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인간의 유한함과 세상의 진보, 내 안에 알게 모르게 쌓여있는 한국적 DNA를 생각했다면 너무 감상적이었던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목도한 사회상과 문화상을 바라보면서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 시대의 역사를 배울 때에는 항상 ‘절망스러운 구한말’과 같은 수식어가 붙었었다. 일제 치하에 국권이 넘어가 식민지의 굴욕의 시대, 온 나라가 잿빛으로 변한 때로 말이다. 비통에 빠져 국민들은 슬퍼했고 단발령과 같은 억지스러운 서구의 문화의 수용을 통해 전 국민이 굴욕적으로 모든 것을 강요받고 그 시대의 우리의 것, 즉 ‘조선’의 혼을 강탈당한 줄로만 알았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물의 수용, 그것이 강요된 움직임에는 틀림없지만 신분제의 폐지와 같이 완전히 사람들의 개념을 뒤엎어버리는 것들의 무분별한 출현으로 그 시대의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또한 동시에 재미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서양에서만 통용되는 줄로만 알았던 모더니즘과 같은 개념들이 우리나라에도 버젓이 존재했고 그것을 상세하게 기술했다는 점에서 책은 충분히 값어치가 있었다.


옛것과 신문물 간의 충돌. 끊임없는 새로운 것들의 출현,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들, 예를 들어 편의 시설이나 서구 사상과 같은 것들이 새로이 들어왔을 때 그때 그 시절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신선함과 충격이었을까. 마치 잡스의 아이폰 출시 발표가 그 시대에 수십 번이나 이루어졌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오늘날의 서울. 내눈에는 너무나 익숙한. <출처=셔터스톡>


영화, 전차 등 사람들의 즐길 거리나 새로운 차원의 교통수단이나 기계들이 마구잡이로 나타났다. 그것들은 마치 어두운 국운 아래에서 일어나는 자그마한 진보와 같은 것들이다. 사람들은 급격한 변화 속에서 빠르게 적응해 나갔고 그것들을 즐기기 시작했다. 꼭 절망의 시대에 절망만이 존재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 음울한 시대에도 사람들은 나름의 생활양식을 찾아가고 있었고 그 안의 즐거움을 찾아갔다.  


 이목을 가장 끌었던 부분은 ‘5장 그래도 윤전기는 돌아간다’의 신문 검열 및 압수를 묘사한 부분이다. 


‘신문은 세 가지 시대가 있었다. 첫 시대는 압수당하는 것을 장하게 여기는 때요, 둘째 시대는 압수당해도 부득이하다고 생각한때요, 셋째 시대는 압수 아니 당하기를 힘쓰는 때다.’ 


우리는 일제 치하 아래 삼십오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무단통치시기(1910-1919년), 문화 정치 시기(1919-1931년), 병참기지화 및 전시동원시기(1931-1945년) 세 단계로 흔히 분류하기도 한다


삼십오 년의 세월은 한 생명이 태어나 장정이 되어 다른 한 생명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긴 시기이다. 물론 역사는 길고 삼십오 년이라는 시간은 비교적 짧아 보일 수 있겠지만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해보자면 삼십오 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더구나 신문물의 유입을 통해 모든 것이 격변하던, 그러니까 하루 자고 나면 세상이 몇 번씩이나 뒤바뀌는 시대에서의 삼십오 년이라는 것은 중세의 삼십오 년과는 판이하게 다른 차원의 시간인 것이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통치 상황에 따라 혹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오는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정확하고 예리하게 신문 검열이라는 부분에서 한 문장으로 표현된 것이다.

경성모던타임스

그 어두웠던 시대에 명과 암. 최소한의 가상 설정을 통해 가감 없이 책은 그 시대상을 담담하게 묘사해 내려나갔다. 특히나 한림이라는 인물의 시점은 낯설었지만 흥미로웠다. 처음엔 일정한 서사를 갖추고 이야기를 풀어내려나 싶었으나 웬걸, 그저 한림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을 주욱 묘사해놓기만 한다. 철저한 산책자의 시점으로. 물론 시간의 흐름은 있지만 그것이 서사적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은 받지 않는다. 그저 상황의 나열만 있을 뿐.


구한말에는 모던걸과 모던보이들 즉 모모족이 존재했다. 2014년, 지금 우리의 서울에는 어떤 젊음이 존재하고 있으며 후세들은 또 우리를 무슨 단어를 붙여 정의 내릴 것인가. 백 년 남짓 지난 후 지금 우리 시대에 어떤 한림과 같은 산책자가 등장해 우리의 시대상을 알려줄 것인가. 책을 덮고 나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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