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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kki Feb 10. 2020

세 얼간이의 필리핀 여행 – 아.우.디!

세부/보홀

“선배! 에어서울 결항됐어요!”


필리핀 출국을 하루 앞둔 오후 10시, 여행 짐을 다 싼 그 시점에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맙소사, 필리핀에 불청객인 태풍 ‘판폰’이 들이닥친 것이다.


전 직장 후배이자 친한 친구가 필리핀 사람과 결혼을 했다. 축하 겸 여행 겸, 겸사겸사 지난 연말에 긴 휴가를 냈다. 한국에서 휴양지로 유명한 보라카이(Boracay)와 가까운 칼리보(Kalibo)에서 결혼식이 이뤄지기에 칼리보에서 양껏 축하를 하고, 같이 가는 두 친구들과 함께 보라카이로 떠날 심산이었다. 그런데, 바로 하루 전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긴 것이다.


출국 전날 받은 알림톡. 실화입니다.


통신이 모두 마비됐기에 결혼 당사자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부푼 마음을 안고 잠이 들 같이 갈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나를 포함해 해외여행과 휴가가 모두 오랜만이었던 이들은 당혹함과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어쩌지, 어쩌지’ 외마디 비명만 외치며 우리는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결혼식 당사자는 미안할 일도 아닌데,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를 전했다.


혹시라도 다시 비행기가 뜰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새벽 한 시에 온 항공권 취소 확정 문자에 이조차 단념해야만 했다. 그때 울리는 나의 심장소리가 내 옆 자리에 누워있는 이에게도 들릴 정도였으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에 받은 스트레스와 충격은 지금도 가늠하기 힘들다.


불가능이란 없다, 우리가 여행지를 바꾸는 법

포기할 순 없었다. 오랜만에 얻은 휴가를. 그래서 우리는 데스티네이션을 바꾸기로 했다. 오전 9시부터 일찍이 출근한 친구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제주, 일본, 블라디보스토크, 대만, 태국, 코타키나발루.. 여러 곳이 논의되었지만 추운 곳은 이미 싸 둔 짐이 모두 여름옷이었기에 선택되지 않았다. 돌아 돌아 결국 태풍 영향권에 없었던 필리핀 세부로 여행지를 결정 후 우리는 빠른 취소와 빠른 예약으로 여행의 모든 것을 뒤집었다.


판폰님이 여행을 뒤집어 놓으셨다.


마치 지방 가는 고속버스를 끊듯, 후다닥 이뤄진 비행 예약이었기 때문에 우리 셋은 같은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두 명이 한 비행기에, 또 한 명이 다른 비행기를 타고 세부로 이동했다.


꿈이 아니라니.

지난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온 필리핀의 첫 공기는 예상외로 습하지 않았다. 그랩을 통해 하루 밤 잠시 묵을 저렴한 숙소로 향했다. 낮게 가라앉은 밤공기와 간간히 보이는 네온사인 그리고 거리의 콜 걸들이 이곳이 한국과 다른 필리핀 세부임을 알렸다.


가는 날까지도 맛보지 못한 졸리비.


유명하다는 졸리비(Jolibee)가 숙소 옆에 위치해 잠시 들렀으나 신용카드가 되지 않는다는 말에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 내일 환전 후 먹지 뭐.’라고 중얼거리며 말이다. 아, 이 순진한 한국인 셋은 그렇게 환전 지옥에 빠지게 될 거라곤 미처 알지 못했다.


뜨거운 햇살과 푸르른 하늘이 반가웠던 다음날 아침. 결국 해냈다는 안도감이 차올랐다. 우리는 여정에 앞서, 달러를 페소로 바꾸고자 했다. ‘월드와이드’ 통용 검색엔진인 구글을 통해 환율을 우대해준다는 업체를 발견해 20여 분간 걸어 방문했다. 환전 맛집답게 오전임에도 이미 많은 현지인들이 대기를 타고 있었다. 한국 환전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총을 찬 가드가 문을 지키고 순서를 지정해주는 것과 대기번호도 전자식이 아닌 수동으로 받아 가는 것이었다.


세부 환전 맛집. 1분 1초가 아까운 여행객들은 절대 방문하지 마시길. 그냥 웃돈 주고 환전하시길.


여느 현지인과 다름없이 앉아서 기다리기를 40분. 도무지 우리의 차례가 오지 않아 가드에게 물어보니 아직 한참 남았다고 답한다. 더 이상 시간을 버릴 수 없어 우리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우리가 이미 여행 전에 부랴부라 예약을 마친 ‘레드크랩’으로 향했다. 레드크랩 또한 환전 서비스를 제공한다. 비록 환율 우대는 없지만, 별 수 없었다.


레드크랩에서 가진 식사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우리가 먹을 대게를 우리 스스로 고를 수 있었고, 한국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식재료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페퍼크랩. 달았다.


“세부에서 한 일, 레드크랩.” 친구1이 킥킥대며 말했다. 곧바로 너나할 것 없이 모두 공감하며 파안했다. 환전까지 마치고 우린 보홀로 들어가는 페리를 타야 했기에 공식적인 세부일정은 모두 끝이었다.


선착장으로 가는 그랩을 기다리는 와중에 바라본 길거리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덥긴 했지만, 춥고 미세먼지 가득한 한국에 비해 맑아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나, 속옷도 입지 않은 한 걸인이 자신의 성기를 내밀고 유유히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거리 속 그 아무도 그 누구도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열심히 동공을 굴리던 우리를 제외하고는. 숨 쉬도록 자연스러운 광경이 우리에겐 그토록 낯설었다. 그리고, 이어진 보홀로 가는 여정에서도 우린 숨 막히도록 기이한 상황들을 맞이다.




우여곡절 끝에 보홀로 떠나게 된 우리. 페리를 타고 알게 된 사실들이 있다.


1.    보홀은 생각보다 매우 큰 섬이다. (찾아보니 3,269 km²임.)

2.    우리의 숙소는 우리가 내리는 곳과 차량으로 1시간가량이나 떨어져 있다.

3.    우리는 밤 10시에 내린다.

4.    보홀은 그랩이 서비스가 되지 않는 지역이다.

5.    우리가 예약한 방은 스위트룸이 아닌 패밀리 룸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패닉과 불안에 빠졌던 우리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으며 산미구엘 라이트를 한 캔씩 고 페리 위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수다를 떨었다. 별이 쏟아지듯 많아 아주 조금은 낭만을 즐길 수 있었다. 낭만은 페리에서 내린 후 완전히 깨져버렸지만 말이다.


낭만의 페리. 파리 아니고 페리.


예상보다 더, 낯선 나라의 항구의 밤은 무서웠다. 탑승객들은 빠르게 흩어졌고, 우리 셋만 덜컥 거리에 남았다. 다섯 명으로 이뤄진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려움 때문인지 꽤나 불량하게 보였던 녀석들은 우리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그때 툭툭을 탄 중년 남성이 우리에게 “택시, 택시”를 외치며 달려왔다. 청소년들에게 삥을 뜯기든지, 툭툭을 타던지 선택을 해야만 했던 우리는 일단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툭툭에 올라탔다. 외교부의 긴급연락문자를 손에 꼭 쥔 채로.


다행히 우리의 육감은 틀리지 않았다. 택시 운전사는 일전에 우리가 묵으려 하는 리조트 ‘플러싱 메도우’에서 오래간 일을 하다가 현재는 여행 가이드를 한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는 우리를 안심시키려 꽤나 노력한 듯하다. 우리의 이름을 묻고, 내일 일정 투어도 가능하면 예약해주겠다는 말을 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굽이진 어두운 비포장 도로를 얼마간 달렸다. 긴장감과 안정감이 교차해서였을까, 괜히 얄궂은 마음이 들어 ‘필리핀 치안’, ‘필리핀 안전’등을 검색했다. 결과는 예상보다 더 절망적. 관련 글을 크게 소리 내어 읽으니 친구 둘이 조용히 좀 하라고 볼멘소리를 냈다.


세부 일정은 망했지만 이젠 편안한 숙소에서 ‘쉼 다운 쉼’을 즐길 수 있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체크인을 마쳤다. 그런데, 우리가 예약한 숙소가 패밀리 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우여곡절 끝에 가장 비싼 방을 예약해서 스위트 룸 비스무리 한 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자세한 말은 생략. 페리에서 친구가 한국에 있는 연인과 나눈 대화로 대체하겠다.

너무 황당해서 욕이 절로. 진짜 이랬음 숙소.

오래된 리조트답게(?) 조식 상태도 매우 오래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오렌지 주스로 예를 들어보자. 열대기후 국가의 리조트에서 기대하는 생과일주스는 바라지도 않는다. 오렌지맛 파우더와 물을 뭉근히 섞은 듯한 묘한 맛의 음료가 그곳에서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오렌지 주스다.


우여곡절 끝에 호핑 투어 또한 리조트를 통해 예약했다. 40여 분간 배를 타고, 발리카삭으로 향했다. 바닷속을 볼 기대에 가장 부풀어 있던 친구2는 뱃멀미가 심해 호핑의 ‘ㅎ’ 자도 건들지 못한 채, 하얗게 질려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호핑 투어를 마치고, 바가지 가득 씌운 차갑고 짜디 짠 필리핀 음식을 입안에 욱여넣고 다시 리조트로 돌아가는 배에 올라탔다.


귓가를 가득 채우는 배 모터 소리에도 깊은 잠이 든 찰나,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순박한 얼굴을 한 뱃사공 청년이 배를 세운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버진 아일랜드’, 간조 때 잠시 나타나는 신비의 섬에 당도한 것이다. 전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았음에도 그 아름다움은 단 일초도 변하지 않았다.


사진빨 안 받는 버진 아일랜드.



구멍 난 텅장 그럼에도 우리는

예정에도 없던 세부, 보홀행이었기에 우리 셋의 월급은 순식간에 증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청난 헛돈을 퍼부었다. ‘도대체 이게 얼마야’, 하면서 탄식하지만 그래도 뒤돌아보면 또 깔깔댄 순간들뿐이다.


친구2와 나는 이십 대 끝자락인 스물아홉에, 친구1은 혼란의 이십대 중반에 서서 각자 고군분투했던 일상을 잠시 멈출 수 있었다. 비록 미션 임파서블처럼 주어진 임무를 처리하느라 우리가 처음에 계획했던 여행은 어렵게 됐지만, 외려 그래서 더 기억에 남을지도 모른다.


1년 치 웃을 일을 그 3박 4일 내에 다 해냈으니, 어쩌면 그걸로 된 거다. 함께 여행을 떠나 준 친구들에게 고하고 싶다. 우리 같이, 성장하고 늙어가자고, 앞으로 또 딱 이 만큼만 즐겁게 여행 다니자고.


줌마들의 정은 질때까지~!”


“오랜 친구들이 주는 축복 중의 하나는 당신이 그들과 함께 일 때 바보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미국 철학자, 에머슨).”
“청춘은 여행이다. 찢어진 주머니에 두 손을 내리꽂은 채 그저 길을 떠나도 좋은 것이다(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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