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ikki Feb 21. 2023

클라이맥스도 기승전결도 없지만

그럼에도 살아지는 게 마치

간만에 H를 만났다. 우리는 자주 보지 않는 느슨한 사이지만, 만나면 언제나 편한 그런 사이다.


문득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무려 8년 전, 내 나이 스물다섯.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때를 꼽으라고 하면 그 해 여름을 꼽을 수 있다. 곧 졸업을 앞둔 학교는 취미로 다녔고, 6개월 뒤 미국으로 일하러 가기 위해 취업준비를 하며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친한 친구가 만나던 남자가 이태원에 어느 거리, 2층에 위치한 아이리시펍 매니저였고, 마침 주말 오픈 아르바이트생을 찾고 있었다. 손님 98%가 외국인이고, 칵테일 제조를 배울 수 있다는 말에 덜컥 지원하였고, 그다음 주부터 출근하게 되었다. 아이리시펍은 포켓볼을 칠 수 있는 포켓볼대와, 다트를 즐길 수 있는 다트 두 개와, 10여 개의 테이블, 그리고 당시 흡연이 가능한 넓은 야외 덱을 가진, 단골 위주의 장사를 하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오후 3시쯤 출근해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고, 대걸레로 닦고, 밤새 떨어진 위스키, 럼, 보드카 등을 채우고, 생맥주 케그가 비어있으면 교체하는 것이 루틴이었다. 영업 준비가 완료되면 사람들이 하나 둘 입장했고, 그들의 주문을 받고, 술을 제조해서 서빙하는 역할을 했다. H와 나는 시프트가 겹쳐서, 한 두 번 마주치다 보니 자연스레 통성명을 하고, 농담 따먹기도 했다. 술도 이따금 한두 잔 같이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걱정으로 가득 찼던, 찬란한 꿈을 품고 생을 지낼 때였다. 친구들과 일주일에 세 번은 넘게 만났고, 대개 시시한 농담 따먹기를 하였다. 누군가의 연애 이야기, 직장 생존기, 길 가다 마주친 고양이 이야기 등 대화 주제는 두서없이 튀었고, 매번 터지는 맥락 없는 웃음은 덤이었다.


행복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감은 늘 마음 한편에 존재했었다. 취업준비생이 생각하는 흔한 그런 걱정들 말이다. 즐거움을 뒤켠으로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내가 즐기는 즐거움은 놀이동산 같은 것이라고. 즐기고 나오면 사라지는 그런 순간, 사진 1~2장으로 박제되어 버리는 그런 굳은 추억으로 말이다.




곧이어 미국에서 인턴 기자로 일했던 나는 1년 동안 500여 개의 기명기사를 썼다. 주말은 특히나 더 바빠 하루에 7~8개의 취재처를 정신없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영주권을 포기하고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그때, 나는 시리도록 아픈 열패감과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인생에 이유, 대체 왜 사는가 생각하면 정말 답이 없다, 어떻게 사느냐가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엇비슷한 이야기를 본 적 있다. 한때 삶의 이유를 미친 듯이 탐색했고, 그 이유를 끝내 알지 못해 허무하고 무기력해했던 지난날을 생각한다.


날씨에는 기승전결이 없다.


막상 다녀오니 달라진 건 없었고 외려 더 노력해야 했다. 인생은 기승전결이 있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그저 매일 같이 지속되는 지루한 날씨예보와 같다는 걸 덜컥 깨달아 버렸다. 심신은 탈진되었으나, 조급한 성격 탓에 여기저기 원서를 넣었고 어쩐지 쉽게 조그마한 회사에 취직은 덜컥 덜컥 잘됐다. 하지만, 내 적성과 맞진 않아 3개월 안에 총 3개의 직장을 다녔다 때려치웠다.  




두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동묘 허름한 골목에 위치한 주간지 발행과 제조 및 유통업도 같이했던 아주 작은 사무실에서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중년 남성치곤 유달리 하얗던, 외꺼풀의 사장님은 굳이 왜 이곳에 지원했냐며 정말 궁금한 듯 물었다. 나는 '그냥요, 지금은 일이 필요해요' 라며 얼버무렸고 그는 더 묻지 않고 영어를 곧잘 하고, 글을 제법 쓰는 스킬 셋이 아깝다 했다.


주 업무는 오래된 데스크톱이 있는 조그마한 자리에서 냉동공조에 관련된 기술 책을 필사하는 것이었다. 이따금 사장님이 일본 바이어와 메일을 주고받을 때 영어로 메일을 대필하기도 하였고, 그때마다 사장님은 나의 자존감 지킴이처럼 "역시"하며 칭찬했다. 300페이지가 넘는 책의 필사를 3주 내로 끝마쳤고, 나는 세 번째 회사에 취직하였다. 사장님은 나에게 행운을 빌어주며 안녕을 고했다.


취직했던 PR 겸 IR 회사는 미국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왔다는 것에 큰 크레딧을 줘 나를 채용하는 것 같았다. 총 다섯 명의 몇 없는 직원들 사이에서도 묘한 권력관계가 보였고, 얼굴은 다들 푸석했다. 특이한 건 인수인계 받았던 첫 업무가 사장실 청소였다. 청소가 끝날때 즈음, 대표의 취향까지 고려하여 향까지 피워야 했다.


일주일 간 인수인계를 해주었던 나보다 두 살 많고, 키는 한 뼘이나 더 컸던 무늬만 대리였던 여자가 알려줬던 업무는 잡무가 주였다. 이를테면, 바로 윗 과장(사실상 오피스 실세 같았다.)이 기자를 접대하였던 영수증을 풀로 A4용지에 붙여서 스캔까지 하여 정리, 뿌린 홍보기사를 실어달라고 얼굴도 모르는 기자 수십여 명에게 전화, 재활용, 설거지, 손님이 사 온 과일 깎기, 뉴스 클리핑을 하루에 세 번 오전 8시, 오후 1시, 오후 7시에 하는 것.. 더불어 첫날부터 야근을 했다. 당시 나를 채용하였던 이사는 이례적인 일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찝찝했다.


대리의 출근 마지막 날, 퇴근을 같이 했다. 시린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고,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삼성역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해방감에 가득찬 얼굴로 문득 그녀가 생경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커뮤니케이션과 홍보에 뜻이 있어 지방에서 올라왔다고 한다.


 "지방대 출신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밑바닥부터 익히고 배우고 싶어 이 회사에 왔어요. 이 회사를 빼곤 아무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2년 동안 홍보기사 한 줄도 쓰지 못했고, 대표실 청소와 잡일만 계속했어요." 솔직하고 절망적인 이야기를 줄줄이 꺼내던 그녀가 당황스러워 얼굴을 힐긋 쳐다보았다. 그녀는 앞만 보며 나에게 나직이 말했다. "도망쳐요. 잠깐 보니 좋은 사람 같던데, 저 2년 동안 매일 7시에 출근해서 9시 넘어서 퇴근했어요. 여기 다니면 본인 생활도 바라는 커리어도 없을 거예요. 나는 그걸 깨닫는데 바보같이 2년이 걸렸어요." 하며 생긋 웃었다.


그 길로 회사를 도망쳤다. 전화할 엄두가 나지 않아 예의 없게 문자로 그만두겠다고 통보하였다. 무서웠다. 나를 채용했던 이사는 이 바닥에서 눈에 띄면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했다. 너 같은 애가 과연 사회생활 하겠냐며 저주 섞인 문자를 몇 통 보내왔다.


염치없지만, 필사를 끝마친 아르바이트 사무실 사장님에게 전화하였다.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사장님은 군말 없이 받아주었고, 심지어 이전보다 시급을 30% 더 올려 나를 채용하였다.주간지에 들어가는 유머 시리즈를(대부분 적당히 외설적인 내용이었다.) 리서치하거나, 제품 특징 및 스펙에 대한 정리, 바이어와의 커뮤니케이션 등의 제법 사무직스러운 일들을 수행했다.


다섯 시 반 이른 퇴근을 하면, 동묘에서 광화문까지 어김없이 걸었고, 도심을 걷는 다양한 인간들의 표정과 옷맵시를 확인하곤 했다. 맛있어 보이는 노포집을 머릿속에 저장하며 언젠간 와야지 하며 메뉴를 흘깃 보기도 하고, 기존과 다른 샛길로 걸어도 보고.. 그렇게 2개월을 꼬박 채우고 다른 곳에 취직해 그 사무실을 떠났다.





지금의 나는 저주를 퍼부었던 그 회사의 이사에게 강력한 한방, "난 너 없이도 잘됐어"하며 독기 있게 성공하지 않았으며, 결국 취직했던 다른 곳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다른 사무실로 이직 했고, 곧이어 또 이직하고 직무를 전환했다. 날 따뜻하게 받아주셨던 사장님과의 연락도 몇 년 후, 자연스럽게 끊겼다. H와는 예전처럼 자주보지 못하지만, 이따금 철 지난 농담 따먹기를 한다.


그러니까.. 이 글을 통해 어떤 기승전결이나 클라이맥스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겪어낸 순간 중 어느 날은 먹구름이 드리웠고, 미풍조차 없이 고요하기도 했으며, 혹 너무나도 쨍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불었거나 단비 같은 봄비가 왔던 그런 날들의 조각을 불현듯 더듬어 보고 싶었다.


클라이맥스도 기승전결도 없지만, 그럼에도 살아지는 게 마치 날씨 같아서.


작가의 이전글 세 얼간이의 필리핀 여행 – 아.우.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