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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kki Mar 20. 2023

사랑은 삶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상처는 아물기 마련

 'amor est vitae essentia'(사랑은 삶의 본질이다).


6년 전, 난생처음 몸에 새긴 타투 문구다. 문득 타투를 새기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구글에 무심코, '라틴어 명언'을 검색했다. 그때 눈에 걸렸던 문장이 바로 'amor est vitae essentia'. 영어보단 더 있어 보이는 라틴어가 좋아 보였고, 뜻도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 며칠을 고민하다 오른쪽 어깨에 타투를 아로새겼다. 솔직히 치기와 겉멋으로 새겼지만, 내 가치관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표어기도 하다.



진심으로 사랑만이 누군갈 구원한다, 적어도 나는 그리 믿는다.





아주 깊고 어두운 터널을 지났던 시간이 있다. 고통과 충격이 메가톤 급으로 커 감각조차 사라질 정도로. 폭력적인 연인과 끝마침을 했다. 끝은 지저분했다. 원치 않게 모두에게 상황이 까발려지게 되었고, 간헐적으로 그의 가족에게 '이러다 죽겠다, 다시 그를 만나달라'는 원망 섞인 연락도 받았다.



때마침 바쁜 일정을 소화했어야 했기에 몸과 마음 군데군데에 난 상처를 외면한 채로 일에만 몰두했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중요한 발표가 있어 얼굴에 난 큰 상처를 무식하게 여러 개의 밴드를 덕지덕지 붙여 가리고, 대강 철 지난 감색 여름 정장 세트를 입고 자리에 나갔다. 얼굴 절반을 가리는 밴드였음에도 아무도 내 얼굴에 붙은 게 무엇이며, 또 어떻게 난 상처인지 묻지 않았다.



모두들 그렇게 마치 모르는 일처럼. 배려와 무관심으로 나를 대해주었던 사람들과, 미칠 듯 바쁘게 흘려버린 시간은 충격을 잊는 데에는 무척 효과적이었다. 다만, 틈새로 흐르는 허무함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럴 땐 흐르게 내버려두었다. 대개 여러 날에 술을 마셨고, 잠들기 어려운 날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큰 불이 지나간 자리에 잿더미만 남은 기분이었다.



우울할 땐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헤어진 다음 날, 문래에서 무작정 친구를 만났다. 문래는 당시 내가 가장 모르던 동네 중 하나였다. 내가 아는 동네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지만, 그저 모르는 곳으로 향하고 싶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신나게 소주와 맥주를 연신 들이켰고, 흥이 나 노래방으로 향했다. 립싱크로만 읊어댔던 BTS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처음으로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꽤나 잘 불려져 흥이 났다.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가을이 끝나가던 그때,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발을 의식적으로 땅에 내딯으며 현실 감각을 찾고자 했다. 그렇게 죽을 듯 노력하다가 스스로가 멍청하고 한심하게 느껴져 부아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



왼쪽 뺨에 크게 난 상처를 지워보려 병원을 방문했다. 상처치료, 특히 얼굴 쪽은 더욱 민감히 다뤄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꽤나 발생할 거라 했다. '될 대로 되라지'라는 마음과 더불어 '진짜 안 지워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통장 잔고가 바닥나 있었던 나는 그저 약국에서 산 2만 원짜리 연고를 몇 번씩 덧대 바르곤 했다. 제발 사라지길 기도하면서.


그 뒤로 나는 강박적으로 사람을 만나고자 했다.
가진 것도 없어 잃을 것도 없었기에 모든 걸 베팅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쁜 업무 탓인지 실제 만남까지 이어진 건 두 번뿐이었다. 바쁜 나를 위해 당시 내가 일하던 양재동까지 친히 차를 몰고 왔던 그는 겁에 질린 것 같은 큰 눈을 가졌었다.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했기에 잠시 짬을 내 맞이했다. 유난히 작은 키와 진한 쌍꺼풀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 몰랐다. 그냥 긴 하루 끝, 몸을 뉘일 때 잠이 쉬이 오지 않아 힘들었을 뿐이었고, 곁에 따뜻한 누군가 있었으면 했지만, 또 누군가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았던 스스로도 모르겠는 뒤죽박죽인 상태였다.



곧이어 만난 이는 큰 키와 깔끔한 옷매무새, 그리고 날카로운 생김새에 비해 따뜻했던 분위기를 지녔다. 적극적이진 않았지만 내 이야기를 경청함으로써 그 존재를 더욱 크게 빛내는 사람이었다. 어쩐지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마음에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계속 그에게 하였고, 그렇게 첫 만남에 새벽까지 이야기를 했다.



한동안은 그가 추천하고 선물해 주었던 책을 읽었다. 출장지에선 그가 무엇을 좋아할까 생각하며 그와 닮은 인형을 선물로 골랐다.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싶었고, 골랐던 선물을 핑계로 그와 시간을 함께 보내려 노력 했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연인이 되었다.



그런 그는 아직까지도 내 옆을 지키고 있다. 불안하고, 가끔은 감당 못할 욕심에 스스로 휘청거려도 늘 그 자리에 존재한다. 가장 바닥에서 기었던 나를 끊임없이 위로 끌어올렸고,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단단한 땅 위를 함께 걷고 있다.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우리는 대개 행복의 순간들을 꾸준히 적립하고 미래를 그리고 있다.



가끔은 나의 폐허가 꿈은 아닌었던지, 이렇게 안정적이고 행복해도 되는 것인지 눈물겹게 생경하다.



시장을 걷다 딸기를 유달리 좋아하는 그를 위해 사는 딸기 한 팩, 잠깐의 수다, 그와 잠시 물리적으로 떨어졌을 때 생각나는 그의 사소한 습관과 취향, 따뜻한 그의 체온과 자그마한 손, 우리 강아지와 함께 하는 산책..



그렇게 어느 순간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어 우리가 되는 그런 순간들.

나의 구원에게 보내는 때 늦은 편지, 나의 본질이 되어줘서 고마워.



<아침의 피아노> 그가 추천해주었던 첫 책, 그 시절(어쩌면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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