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200km가 가능한 나라 독일
"도착하면 바로 전화하고, 거기 서도 카톡 할 수 있니? 여권 잘 챙기고,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받아먹지 말고, 모르는 사람 이랑 같이 다니지도 말고"
"무슨 일 생기면 보험사에 연락하고, 아니지 연락할 일이 생기면 안 되지"
"엄마, 아빠? 스톱! 걱정 그만하고 도착하면 꼭 바로 전화할게, 카톡 당연히 할 수 있지, 내가 수시로 카톡 보내줄게 오케이? 낯선 사람 절~~~~~대로 가까이 안 할 거니까 걱정 말아"
34살 다미가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지 온갖 주의 사항을 끊임없이 나열하는 부모님의 근심 걱정에 다미가 못 말린다는 말투로 대답한다. 다미의 엄마는 아직 더 전해줄 주의사항과 확인할 사항이 많지만 꾹 눌러 담는다. 대신 탑승수속을 앞둔 다미의 손을 잡으며 한없이 여리고 보드러워 보이는 손등을 두어 번 쓸어내린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커서 말도 잘 안 통하는 해외로 나간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차 생각하지 말고 언제든지 연락해."
"알았어, 두 발 쭉 뻗고 자고 있어, 내가 종종 모닝콜해 줄게"
다미는 어느새 눈시울이 벌게지는 부모님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 팔을 뻗어 부모님을 동시에 꼭 끌어안고 눈물을 참는다. 어렸을 땐 엄청 커 보였던 부모님이었는데 이렇게 안아 보니 너무나 작아진 부모님에 울컥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미는 씩씩하게 인사한다.
"엄마 아빠, 잘 다녀올게요, 사랑해요."
지금껏 국내 항공사만 이용하다가 처음으로 외국 항공사 비행기를 탈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긴장이 바짝 들어갔다. 다미는 필요 이상으로 비장한 각오와 표정으로 캐리어를 끌고 탑승 게이트로 이동했다. 그런데 걱정과 다르게 비행기 입구에서 밝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한국 스튜어디스를 만나는 순간부터 모든 긴장이 스르르 풀어졌다.
'아싸! 한국인!'
기내식 선택부터 모든 선택을 한국어로 할 수 있다는 기쁨에 다미의 행복 지수는 이미 여행지에 도착한 만큼 상승했다. 마치 비행기를 처음 탄 사람처럼 창밖으로 보이는 하얀 구름을 연신 찍어 되며 현재의 안도감에 흠뻑 취해서 그렇게 잠이 들었지만.....
"으!!!! 찌뿌둥해!!!!"
17시간 정도야 잠자고 영화 보며 이것저것 하다 보면 금방 지나가겠지 하고 우습게 봤던 장거리 비행은 직접 경험해 보니 이런 고역이 없었다. 앉아서 숙면을 취한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기내식은 뭐 이리 자주 나오는지 앉은 자세에서 계속 먹고 졸고, 먹고 졸고를 여러 번 반복 끝에 뒤셀도르프 국제공항에 도착한 다미는 수십 번 기지개를 켜어댔다. 특히나 헬싱키에서 짧게 경유를 했던 다미는 지하철 환승과는 비교가 안 되는 비행기 환승에서 극도의 피곤함을 경험했다. 게다가 헬싱키에서 출발하는 비행기에는 한국 승무원이 없었고 승객들도 대부분 유럽인들 이였다. 검은 머리가 거의 없는 승객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된듯한 묘한 기분을 느끼며 바짝 긴장을 하고 온 다미는 뒤셀도르프에 도착할 무렵엔 몇 날 며칠 야근을 한 몸처럼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유럽을 가면 신기함과 설렘이 있을 줄 알았는데 노란 머리 사이에 혼자 검은 머리로 있는다는 건 생각보다 불편한 경험이었고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다미였다. 마치 메인 주연배우로 살다가 갑자기 엑스트라가 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어 괜히 왔나 싶은 후회가 잠시 밀려왔지만 이내 인천공항에서 봤던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신을 차렸다.
"박다미, 기죽지 말자, 너는 엄마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딸이야!"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했었던 포옹의 감각이 비타민처럼 다미의 몸안을 흐르며 다시 활기를 넣어 주었다. 하지만 이 활기는 얼마 가지 않아 푸쉬쉬 꺼져 버렸다. 수속 심사를 위해 길고 긴 줄을 기다려 드디어 다미의 차례가 되었다.
긴장되지만 덤덤한 표정으로 선 다미에게 외국인 직원은 감정 없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바로 여행의 목적과 며칠을 머물 건지를 물어본다. 한국땅에서 벗어나고 첫 외국인과 대화를 해야 하는 관문을 만난 다미는 바짝 긴장을 한 탓에 직원의 빠른 영어 속에서 겨우 몇 단어 정도만 알아듣고 대답을 했다. 이 정도면 그래도 잘하고 있다고 안심을 하는 찰나 티켓을 보여 달라는 직원에 다미는 본인이 인천에서 발급받았던 탑승권을 보여준다. 그러자 직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또다시 뭐라 하며 티켓을 보여달라고 하고 다미는 이때부터 본인이 누락한 서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땀을 삐질 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No, 불라 불라, ticket 불라 불라"
다미에게 직원의 대화는 이렇게만 들렸고 또 어떤 티켓을 보여 줘야 하는지 혼란에 빠져 버렸다.
'분명히 비자는 필요 없다고 했는데 비자를 이야기하는 건가?'
"Do you want VISA?"
짧은 영어를 쥐어 짜내어 물어보지만 직원은 답답하다는 듯이 계속 티켓을 보여달라고 하고 다미는 계속 인천이 찍혀 있는 탑승권을 보여주며 똑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난 이 티켓밖에 없단 말이야!'
"I only have this ticket!"
계속 대기가 길어지자 다미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직원에게 "sorry"를 외친 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국인처럼 보이는 아시아인을 잡고 물어본다.
"죄송한데요, 이 사람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예요?"
엄격한 수속 심사대에서 대기 중인 가족도 아닌 타인에게 도움을 청한 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직원도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다미에게 말한 영어 문장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들려준다.
"네? 어? 티켓을 보여달라는 거 같은데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건지 아니면 이 남자도 그다지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지 다미가 이해한 정도의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 건너편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코 앞에 있는데 만나지 못하는 이 상황에 답답함을 느끼다가 순간 자신의 오른손에 있는 핸드폰을 발견하고 바로 보이스톡을 시도한다. 다행히 게이트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미의 친구 '김다미'는 바로 전화를 받는다.
"도착했어? 왜 이렇게 안 나와?"
"나 지금 잡혔어! 자꾸 티켓을 보여달래! 이야기 좀 해봐!"
다급해진 다미는 직원에게 바꿔주려 시도했지만 직원은 처음 보는 카카오톡 보이스톡 화면에 이게 아니고 티켓을 달라고 손을 절레절레 저어 보인다.
'아쒸! 통화중라고! 친구가 영어 잘하니까 도와줄 거라고'
"This is calling! my friend help you!"
엉망진창 영어를 내뱉으며 다미가 제발 좀 전화 좀 받아 달라고 애걸을 하자 직원은 이제야 이해한 듯 전화를 전달받는다. 그러더니 곧바로 독일어로 추정되는 언어로 뭐라 대화 나누더니 바로 다미에게 핸드폰을 넘겨준다. 문제의 티켓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재빠르게 전화를 돌려받자 본인만큼 다급한 김다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미야! 한국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보여달래!"
"아! 그 티켓을 의미하는 거였어? 고마워!"
다미는 허탈함이 섞인 탄식과 함께 빠르게 통화를 끊고 메일함으로 들어가 돌아오는 탑승권을 보여준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과 지침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다미가 내민 티켓을 확인한다. 다음엔 돌아가는 티켓을 미리 잘 준비해 놓으라고 말하는 듯한 영어문장을 말하며 드디어 다미에게 독일 입국을 허가해 준다.
"불라 불라 return ticket 불라 불라 next time"
"Okay! Thank you so much!"
정말 잠시동안 너무 미웠던 외국인 직원이지만 순식간에 사라지는 원망과 올라오는 환희에 힘차게 땡큐를 외치고 드디어 게이트로 향하기 시작했다. 12월, 한국도 독일도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추운 겨울이었지만 의도치 않게 진땀을 뻘뻘 흘린 다미는 패딩 조끼를 벗어 캐리어에 두르고 친구 '김다미'가 기다리고 있는 게이트로 향했다.
"깔깔깔, 아 진짜 대박! 그 뒤에 계시던 한국분은 얼마나 당황하셨겠어"
그 당시엔 어느 액션영화 못지않게 박진감 넘쳤던 일이지만, 모든 게 잘 해결된 지금 다미는 친구에게 공항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마치 어제도 만났던 친구처럼 둘은 수다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야, 말도 마, 나 진짜 다시 한국 가야 하는지 알았어. 진짜 돌아가면 영어 공부 해야지, 이게 무슨 나라 망신이야. 그 직원 한국인들 다 나처럼 영어 못하는 걸로 오해하면 어쩌지?"
"됐어, 됐어 다 지난 일인데 뭐, 여하튼 지금 이렇게 즐기고 있으면 된 거지."
다미는 친구의 위로에 위안 삼으며 조수석에 앉아 긴장을 풀고 차 안을 둘러본다.
"이열! 외제차, 김다미 너 돈 잘 버나보다."
다미의 말에 김다미는 황당하다는 듯 웃어 보인다.
"야, 이거 한국에서나 외제차지, 여기선 국산차야. 그리고 새 차는 비싸서 못사, 중고차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순간부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잠시 이곳이 독일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선 외제차였던 독일차 브랜드가 자국에선 국산차가 되는 게 당연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신기하면서도 말장난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핸드폰 내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입력한 김다미는 핸들을 잡고 다미를 바라보며 비장하게 말한다.
"안전벨트 단단히 매고, 요즘 기름값 올라서 잘 안 밟는데 딱 한 번만 보여줄 거니까 핸드폰 잘 준비하고 있어."
"밟는다고? 아니 난 안전운전이 제일 좋아, 우리 천천히 가자."
"걱정 마셔, 딱 한 번만 보여줄 거니까."
"뭘 보여준다는 거야?"
"독일 고속도로에는 속도 제한이 없어, 물론 가끔 있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속도 제한이 없어, 너 그거 알아? 시속 200km로 달리면 무중력 상태에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 그렇구나, 잠깐만 뭐?! 200km?!! 야 그러다가 죽어!"
다미는 상상도 하지 못할 속도에 깜짝 놀라서 자신의 친구를 말리지만 그녀는 딱 한 번뿐인 기회라며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1차선 도로를 타기 시작한다. 그리곤 서서히 액셀을 밟기 시작했다.
"불법도 아닌데 뭐 이리 난리야, 어서 카메라나 켜, 딱 한 번만 정점 찍고 끝낼 거야."
"세상에, 미쳤나 봐!!"
입 밖으로 던지는 비명과 다르게 다미는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 어플을 실행시키며 계기판에 서서히 올라가는 시속을 바라본다. 점점 170, 190이 넘어가자 차와 바람이 서로 맞겨루기를 하는 듯 시끄럽다고 느낄 정도로 차체에 소음이 울려 퍼진다. 귓가에 울리는 소음과 올라가는 계기판의 숫자가 합세해 청각과 시각 동시에 두려움이 찾아온다.
동시에 여행자 보험에 사망보험이 얼마가 가입되어 있었는지 잠시 생각한 자신에 헛웃음이 나오는 순간, 갑자기 자동차가 살짝 공중에 떠서 멈춘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창밖으로는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차들과 나무들을 봐선 분명히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몸의 신경세포가 빠른 속도에 정신을 놔 버린 건지 지구상의 모든 것들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무중력 상태에 들어간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는 친구의 말이 이해가 감과 동시에 계기판에 200km를 약간 넘긴 바늘을 바라보며 감탄에 더 가까운 허탈한 탄식을 내뱉는다. 그리곤 '찰칵' 소리와 함께 작은 하드웨어에 소름 끼치는 순간을 저장하는 데 성공한다.
사진을 찍자마자 정신이 돌아온 다미는 다급하게 친구를 닦달한다.
"야! 이제 빨리 줄여 줄여!"
다급한 다미와 다르게 김다미는 능숙하게 백미러로 뒤차의 간격을 확인하곤 속도를 줄였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줄이더니 2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한다. 이제야 비로써 안심한 다미는 계기판의 120km 숫자를 보곤 황당한 웃음을 짓는다. 분명 느린 속도가 아닌데 방금 느꼈던 어마어마했던 속도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어찌 됐든 드디어 타이어와 땅과 마찰도 느껴지고 차내에서 울려 퍼졌던 바람과 혈투하는 소음도 멈췄다. 그제야 다미는 온몸에 잔뜩 들어갔던 긴장이 풀어졌는지 친구를 타박하기 시작한다.
"야, 너 다시는 이렇게 달리지 마, 너 진짜 이러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해!"
"야, 걱정마, 요절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게 기름값이야. 요즘은 기름값이 하도 올라서 대부분 서행해, 아주 가끔씩 작정하고 스피드를 즐기러 온 사람들만 밟아"
말 끝나기 무섭게 스포츠카 동호회에서 단체로 드라이브를 왔는지 화려한 색깔을 뽐내며 낮은 차체의 스포츠카들이 줄을 지어서 쌩하고 지나간다.
'아고아고, 저러다가 단체로 골로 가지'
쯧쯧 거리며 앨범의 사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다미였다. 여행 와서 찍은 첫 사진이 차량 속도 계기판이라니 헛웃음이 나는 다미였다.
얼마 달리지 않아 바로 도심 중심가 쪽으로 들어온 듯 주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미는 서울보단 좀 더 한적하지만 군데군데 높은 빌딩이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물어온다.
"여기 건물은 별로 알록달록한 색이 아니네?"
"네가 SNS에서 봤던 그런 건물들은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더 많아, 네덜란드만 가도 많고 수두룩 하니까 아마 질리도록 보게 될 거야."
"그렇구나, 그래도 이쁘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미는 창문을 내리고 펄럭이는 연들과 멀리 보이는 건물을 카메라에 담는다. 달리는 차에서 찍어서 결과물은 그다지 맘에 들진 않지만 여하튼 자동차 속도 계기판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는 다미다.
"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고프지? 내가 이 근처에 식당 예약해 놨어, 일단 저녁부터 먹자!"
"오 좋아! 독일 하면 소시지? 스니첼? 학센?"
"무슨 소리야, 독일 하면 맥주지!"
식당 앞에 주차를 한 김다미는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식당으로 다미를 인도했다. 장거리 비행 끝에 독일 맥주라니, 자동으로 올라오는 갈증을 느끼며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다가 마주한 이국적인 풍경에 잠시 멈추고 카메라에 담았다. 심플한 건물들 사이에 이국적인 독일어가 적혀있는 표지판과 그 틈새로 보이는 역사가 느껴지는 성당, 그리고 이를 배경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독일인들의 뒷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식당을 들어가자 북적북적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제법 시끄럽다. 김다미가 직장 동료들이랑 가끔씩 찾는다는 맥주바의 원형테이블에 앉아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는 듯 다미는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식당 가득히 매운 이국적인 외모의 독일인들 사이에서 아시아인은 자신과 제 친구 밖에 없어 보인다. 아마도 베를린 같은 유명한 여행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대부분 현지인들로 보인다. 제 친구가 아니었으면 이름도 몰랐을 뒤셀도르프르에서, 그것도 현지인들이 바글바글한 식당에 있는 이 순간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주변을 살피며 살짝 멍 때리고 있는데 김다미의 목소리가 다미의 귓가에 울려 퍼진다.
"여기는 소시지가 맛있어, 내가 알아서 시켜도 되지?"
"그럼! 그럼! 소시지는 언제나 옳지!"
소시지라는 단어에 다미의 침샘이 본능에 충실하게 반응하고, 갑자기 허기짐을 느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대답하는 다미였다. 당장이라도 접시통째로 음식을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급한 다미와 반대로 여유롭게 맥주잔을 들고 지나가는 웨이터와 김다미는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리곤 임무를 완료했다는 듯 등받이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댄다.
"뭐야? 방금 주문한 거야? 여긴 눈빛으로 주문하는 곳이야?"
"뭐? 푸핫!"
다미의 말에 김다미가 빵 터지는 그 순간 웨이터가 메뉴판을 들고 오고 다미는 능숙한 독일어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더니 주문하고선 다시 자세를 잡는다.
"아 , 박다미 진짜 웃겨, 그게 아니고 유럽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를 부르고 싶으면 눈을 마주쳐야 돼, 여긴 한국처럼 벨도 없고 절대로 손을 들어서 불러도 안 돼."
그러고 보니 테이블엔 딸랑 냅킨과 컴받침만 존재한다. 진동벨이 없는 건 그렇다 치고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부르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니 귀중한 정보를 얻은 다미였다.
"손을 들어서 부르는 건 왜 안되는데?"
"손짓으로 부르는 건 마치 애완견을 다루는 것과 같은 행위 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돼. 여긴 모든 가게가 손님과 가게주인의 만남이 아니고 동등한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야, 단지 이용객이 가게의 서비스를 돈을 주고 이용하는 것뿐이야. 그거 알아? 여긴 절대 '고객은 왕이다'라는 마음가짐이 아니야."
"아..... 세상에 그렇구나, 정말 조심해야겠다!"
다미는 한국을 벗어나자마자 문화 차이를 느끼며 다시 한번 중요한 에티켓을 기억한다. 그와 동시에 '고객은 왕이다'라는 개념이 없는 회사에서 일하면 어떨까 하는 현실적인 궁금증이 몰려왔다.
"그럼 독일 회사에서 일해보니까 어때? 고객이 왕이 아닌 회사에선 어떻게 일해?"
"흠, 독일에서의 회사는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지 그 이상 그 이하 어느 것도 아니야."
사실 다미의 친구 김다미는 졸업 후 한국 대기업에 취직해서 몇 년간 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독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런데 어학연수 갔던 친구가 독일 회사에 취직해서 완전히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다미가 밀려오는 궁금증을 김다미에게 건네려는 순간 음식이 등장했다.
"우와....."
한국 레스토랑에 비해 소박해 보이는 음식에 살짝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영혼 없는 감탄사를 내뱉자 김다미가 싱긋 웃으면서 말하면서 잔을 들어 건배를 청한다.
"이제 이런 음식 많이 보게 될 거야, 모든 요리는 원디쉬, 그래도 맛은 기가 막히니까 한번 먹어봐"
속마음을 들켜 버린 다미는 멋쩍게 웃으면서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자마자 곧바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거 뭐야! 우와, 여기 맥주 맛집이네!"
"여긴 웬만하면 맥주는 다 수제 맥주여서 맛있어. 너 여행 기간 동안 잘 조절해라 금방 배 나온다."
피식 웃으며 나이프로 소시지를 한입 크기로 자르던 김다미는 다미가 이런 반응을 보일줄 알았다는 듯 무심하게 소시지를 건네며 말한다.
"먹어봐, 여기 야채랑 곁들여 먹는 걸 추천해."
맥주에 감격한 다미는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소시지를 한입에 넣는다. 한국 비엔나소시지 같은 탱글함은 덜하지만 다진 고기가 느껴지는 육즙이 꽉 찬 맛에 다미가 감탄을 한다.
"오, 한국 소시지랑은 또 다르게 맛있는데?"
말 끝남과 동시에 바로 맥주를 들이켜는 다미에게 어서 곁들여 나온 데친 초록 야채를 먹으라고 권한다.
"솔직히 좀 짜지? 그래서 여기 감자랑 데친 채소를 같이 먹어야 돼."
"맞아, 맛있긴 한데 좀 짜긴 했어 히히, 어디 한번 이건 어떤 맛일까."
다미는 시금치를 잘게 자른 것처럼 보이는 데친 초록 채소를 포크로 한 움큼 떠서 맛을 본다. 그저 데친 야채인 줄 알았는데 양념을 어떻게 한 건지, 어떤 재료를 배합한 건지 간도 과하지 않게 잘 되어 있었다. 모든 메인 디쉬에 잘 어울릴 거 같은 이 정체불명의 음식에 다미는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야채의 아삭함이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살짝 데쳐서 버무린 게 전부인 거처럼 보이는 초록야채를 먹으며 벌써부터 하얀 쌀밥이 생각나는 다미였다.
"이거 뭐야? 이게 제일 맛있어! 이거랑 흰쌀밥이랑 곁들여서 된장찌개랑 같이 먹으면 진짜 맛있겠다!"
소시지가 민망할 정도로 데친 야채만 먹는 다미에게 김다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우하하하, 벌써 된장찌개가 생각나면 어떡하냐, 사실 나도 재료는 뭔지 몰라, 시금치 인가? 나라고 뭐 알겠니."
"헤헤헤 맞아, 하긴 네가 우리 엄마도 아니고."
소박해 보였지만 맛은 전혀 소박하지 않은 안주와 함께 어느새 맥주 두 잔을 비워 버린 다미는 기분 좋은 포만감을 안고 식당에서 나왔다. 여행 첫날 딱히 명소를 가지도 않았지만 오랜 친구를 만나고 특색과 맛도 어느 것도 놓치지 않는 로컬 음식의 매력에 한껏 흥이 돋았다. 김다미는 친구가 만족하자 본인도 뿌듯함을 느끼며 다미의 여행 계획을 물어본다.
"앞으로 계획은 뭐야? 이제 어디 갈 거야?"
"응? 아직 아무런 계획도 없는데? 한숨 자고 생각해 보려고, 헤헤"
"네에??"
대학시절에도 걱정 없는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대책 없는 아이였다니 새삼 다시 놀라는 김다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미는 룰루랄라 차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