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베러 Oct 28. 2024

현실적 낭만주의자의 현실 적응기

독립서점 지기를 꿈꾸는 7년차 치과위생사 이야기 1탄


며칠 전 중학교 시절 단짝 친구를 근 10년 만에 만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세월이라 하는데 오랜만에 만난 그녀와 나는 외적으로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우리가 외적으론 크게 달라진 게 없지만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 현재는 각자 10대 시절 서로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와는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다든지. 각기 다른 20대 시절을 보내고 성장하고선 서른, 정확히 말하면 스물아홉의 끝자락에 서로를 다시 만났다는 점이다. 안 보고 지낸지 오래 된 사이였지만 근근이 SNS를 통해 서로의 일상을 보던 우리. 그녀는 얼마 전 내 블로그를 통해 내가 독립서점 책방지기를 꿈꾼다는 글을 읽었다고 했다. 쑥스러움과 민망함 그리고 궁금함이 뇌리를 스쳤다.



"아, 진짜? 읽어줬구나. 혹시 읽고는 어떤 생각이 들었어?"



"나는 이제 네가 제대로 된 너의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 생각했어."



"정말? 왜 그렇게 생각이 든 거야?"



"너는 중학교 때부터 책을 아주 좋아했잖아. 아주 오래전부터 말이야. 나는 학창 시절에 있지, 네가 치위생학과를 진학한다고 했을 때 잘 어울리듯싶었지만 네가 이런 계열로 가면 어떨까 늘 생각했었어. 더 잘 어울리기도 하고. 조금은 되돌아왔지만 이제 너에게 맞는 옷을 입는 듯, 더 잘 어울리는 길을 가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있지 나는 가끔 네가 부러웠어. 나는 멀티가 안 돼서 오로지 하나만 선택해서 집중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너는 보면 현실적 낭만주의자답게 현실적인 면모도 잘 해내고 네가 좋아하는 낭만주의의 삶을 또 잘 즐기니 말이야." 



이렇게 타인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말해주는 친구였나 싶어 놀랬기도 했고, 내게 해주는 진심 어린 말들이 정말 고마웠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 고등학교 단짝 친구에게도 같은 얘기를 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응, 재이 너는 원래 고등학교 때도 서점 내고 싶어 했잖아. 원래 하고 싶어 했으니 크게 놀랍지는 않다야."



어린 시절부터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실은 잊고 지냈다. 

책방지기가 되겠다는 내 마음이 몇 년간의 나의 행보에서 이어지는, 어쩌면 하늘이 내려준 운명 (개인적으로 서점 지기들은 하늘이 내려준 운명이라 생각한다)과 같은 일련의 절차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내 마음 한편에 늘 자리 잡혀 있었고, 친구들에게 내뱉고 다닌 어떤 종류의 꿈이었던 거다. 실은 가장 이루고 싶은 꿈. 

15살, 부모님의 이혼을 몸소 체감하고 이해했지만 알게 모르게 마음에 멍이 들었던 나는, 당시 가장 위로받았던 대상이 바로 책이었다. 책 속에선 주인공들과 함께 울고 웃었으며 자유롭게 꿈꿀 수 있었다.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나는 무엇이든 상상하고 생각하며 표현할 수도 있었다. 책을 읽는 그 과정이야말로 내게는 매일 심리상담소에 가서 상담을 받는 행위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린 시절부터 늘 책이 있는 공간에 있을 때 가장 안정감을 느꼈다. 동네에 있는 도서관도 좋아했지만 새 책 냄새를 좋아해서인지 가장 좋아했던 곳은 큰 대형서점이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모토를 가진 그곳은 문화생활의 불모지였던 나의 고향에서 유일하게 손에 꼽을만한 문화의 장소였다.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애정이 다소 낮았던 내가, 바깥이라도 나가는 날이면 항상 서점에 가서는 수많은 책들을 보고 구경하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양반다리로 퍼질러 앉아 책을 읽고선 꼭 책 한 권씩을 사서 집에 돌아오곤 했다. 당시 친구들에게 'OO 문고가 우리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발언에 친구들의 놀란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린 시절의 나날을 그렇게 보내오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당시 내가 대학에 진학해 전공하고 싶었던 학과는 광고홍보학과나 신문방송학과였다. 어린 시절의 미적 감각도 살리며 내가 사랑하는 활자들이 공존하는 학과들이 해당 전공이라 생각했다. 고등학교 2학때쯤 아빠는 무슨 학과를 전공하고 싶냐고 내게 물으셨다. 나는 당당하게 앞서 들었던 생각들을 말씀드렸고 아빠는 그런 내게 "너 그 학과 전공해서 뭐 먹고 살래", "취업난이 엄청 힘든데 그런 학과 나와서 취업은 제대로 할 수 있겠냐"라는 둥 말씀하셨고 나의 꿈은 현실이란 구름 속으로 서서히 가려지고 있었다.

명절이라도 되면 치위생학과 박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교수직까지 하고 계시는 작은 엄마는 나를 불러 작은 방에 가두고선 몇 시간 동안 취업난에 대해 강연 하셨다. 그때 나를 가장 반응 시킨 건 내가 빨리 경제적 자립을 해서 힘든 엄마의 상황을 덜어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큰 돈이든 작은 돈이든 벌 수 있게끔 취업이 가장 먼저가 되는 학과를 전공해야 한다는 것. 당시 나는 너무 지쳤고 최선이 불가능하다면 차선 중에서 가장 최고인 곳을 가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일렀다. 그래서 내가 있는 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4년제 치위생학과에 진학했다. 본교에서 치과위생사는 '구강보건 예방교육자'라고 계속 가르쳤고, 깊은 논문 공부, 더불어 다양한 종류의 실습과 관련 컨퍼런스까지 시키셨다. 전공 공부하는 자체는 재밌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여초 학과 특유의 공기의 흐름이 숨 막히고 답답했다. 그래서 당시 학과 생활보다는 다양한 대외활동에 눈을 돌리며 전공 학과 공부를 넘어서는 것들을 많이 경험하자고 다짐했고 실행했다. 20대 초반엔 머물렀던 지역에 있던 독서모임 게스트로 자주 참여를 했다. 나는 당시 대학생이었지만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직장인 멤버들이 해당 독서모임에서 주 게스트들이었기에 자기소개를 하면 항상 어린 나이에 벌써 이런 곳에 왔냐는 평이 다수였다. 학과 생활과 대외활동을 병행하던 나는, 고학년이 되었고 실제로 사람들과 대면하며 직접적으로 행위를 하는 임상 실습 과목과 해당 실습을 접목시켜 발표하는 컨퍼런스 과제는 대부분 최상위권의 점수를 받았기에 스스로 현장에 최적화된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마지막 로컬 실습지에서 실습을 끝낸 후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았고 국가고시를 끝내고선 정직원 제의를 받았다. 그렇게 치과위생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삶이 시작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