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윤의 해금이야기
1. Art is on you _ 석관동 캠퍼스
중고등학교 시절 예악사상이 근본이 되는 학교였기에 엄격한 학풍이 있었다. “엄하고 귀하게!”를 강조하시던 교장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을 자애롭게 아끼는 동시에 인사예절부터 젓가락질하는 식사예절까지 꼼꼼하게 챙기시던 분이셨다. 교복 치마도 너무 길고 청학동에서 막 내려온 학생처럼 머리를 땋고 다녀야 하는 것도 가혹하게 느껴지던 시절이다. 당시 짧고 타이트한 교복 치마가 유행이었는데 다른 예고 학생들은 아이돌 같은 세련미로 여대생 못지않게 어여쁜 모습이었다. 지하철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부러워서 한숨이 날 지경이었다. 우리 학교만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예악사상이니 예절이니 하는 것들이 답답하게만 느껴졌고 하루라도 빨리 이 시간을 탈출하고 싶었다.
대학에 입학하니 자유로운 학풍이었다. 신생 예술학교니 그럴 만도 했다. 교문 앞을 나서면 미술원 학생들이 벚꽃 나무 아래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학교 앞 사거리를 막아놓고 영상원 학생들이 영화를 찍고 있었다. 학교 식당에 가면 배우처럼 잘 생기고 예쁜 예비 배우, 연극원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다녔다. 내가 억압(?)과 과보호 속에 여전히 고등학생의 정신연령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은 달랐다. 자기만의 색깔과 주관이 뚜렷해보였다. 그들은 십대를 어떻게 살아낸 것일까? 어떻게 저렇게 특별한 아우라가 나오는 거지? 사람 구경을 하며 호기심도 들고 신도 났다. 그래, 예술가라면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런 확신 속에 신나게 캠퍼스를 누볐다.
석관동 캠퍼스는 전 안기부 건물을 물려받아 쓰는 것이었기에 교사가 말끔하다고 볼 수 없었다. 영상원은 지층에 편집실이 있었는데 옛날 안기부 고문실이라는 소문, 이곳에서 밤샘 편집을 하다보면 발 없는 귀신이 걸어 다닌다는 소문, 전통예술원 쪽 건물에 높이 올라와 있는 굴뚝은 고문으로 죽은 이들의 화장터로 사용되던 것이라는 소문 등 캠퍼스 괴담도 많았다. 강의실과 여러 공간들은 임시방편으로 갈라놓은 것 같기도 했고, 전통예술원의 경우 컨테이너로 임시로 지어놓은 건물을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어수선한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공간은 사람이 채우는 거라고, 개성과 끼가 넘치는 학생들에 의해 공간마다 생기가 있었다.
학교 로비 쪽 예술극장에 가면 연극원, 음악원, 전통예술원의 공연이 열렸고 2층 전시실로 가면 미술원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학교 안에는 볼거리가 항상 넘쳤다. 낮엔 전통원과 연극원이 협업한 연극 ‘쑥부쟁이’를 보고, 저녁엔 음악원의 오페라 ‘박쥐’를 보는 식이었다. 친구들과 연습하며 학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는데 전통예술원 뿐 아니고 다른 원의 학생들도 그랬다. 밤을 새워 결과물을 만들고 전시하고 공연하는 것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몰입한 분위기였다. 대학생다운 멋을 내고 다니는 학생들보다는 ‘나 지금 몰입 중’이라는 말을 대신한 추리닝이나 작업복 차림의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학교 도서관에 가면 학교 굿즈가 있었다. 엽서 혹은 북마크로 간소한 것들이었다. 그 가운데 ‘ART IS ON YOU’ 라는 슬로건이 박혀있는 엽서를 챙겨 항상 지니고 다녔다. 학교 안 어디를 둘러보아도 ‘예술이 지상 최대의 가치’라는 확고함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다. 세속적인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예술을 잉태할 수 있었던 시간. 허름한 석관동 캠퍼스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수혈 받던 시절이다.
2. 충격과 모험
수업 후 연습을 하고 친구들과 저녁으로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캠퍼스 탐험을 하는 것이 일과였다. 2층에 가면 넓은 전시실이 있었다. <미술원 Foundation Exibition>. 파운데이션이 뭐지? 아마 기초과정을 말하는 것이겠다. 미술원 기초과정 발표전이였다.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잘은 모르지만 여태껏 내가 봐왔던 것과는 화끈하게 다른 지점이 있는 작품들이었고, 신선하고 재미있게 다가왔다.
미술원은 여타 미술대학과 분명한 차별점이 있었다. 입시미술에 단련된 기술이 좋은 학생보다는 자기세계가 분명한, 작가적인 가능성이 있는가를 보고 학생을 뽑는다. 이런 학생들은 뽑아 놓고는 또 다시 단련을 하는 부분은 기존의 사고방식을 깨부수는 것이다. 기술보다는 관념과 관점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창의적인 생각을 할지, 어떻게 해야 남과 다른 결과물을 낼 수 있는지가 관건인 듯 했다.
그런 의미에서 수업의 제목이 ‘충격과 모험’이다. 이 ‘충격과 모험’의 과제는 스스로 모험을 감행하고 관람객이 된 학우들에게 충격적인 결과물을 주어야 한다. 석관동 허름한 학교 식당 점심 배식 시간. 연미복을 입고 1500원짜리 급식을 먹으며 음악원의 친구연주자들을 불러 현악4중주를 연주하게 하며 고급스런 식사를 즐기는 이도 있었다. 산에 친구들을 불러 모아 키우던 개를 지금 죽이겠다는 연기를 한 이도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미술원 친구들에게 들은 ‘충격과 모험’ 과제 발표 퍼포먼스다. 미술원 친구들은 학교 작업장에 라꾸라꾸 침대를 갖다놓고 밤샘 야작을 한다던데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만으로도 충격이고 재미난 이야기꺼리 였는데, 전시회는 더 흥미로웠다. 전시는 학교 로비에 축제 기간과 맞물려 열렸다. 성기 모양을 만들어 그 안에 구더기를 가득 채워 넣은 조형물. 갖가지 성기와 성기를 상징하는 그림과 작품들이 내걸렸다. 때로 꽃은 여성의 성기와 맞물려 하나의 형상이 되었다. 이는 아름답게 보이기도, 화난 듯 보이기도 했다.
‘충격과 모험’ 수업에 진짜 충격을 받은 이는 나였을 것이다. 예술이란, 공자의 예악사상 뿐 아니구나. 격식과 형식으로 점철된 내가 배운 무대예술이 다가 아니구나. 이제 충격은 받았으니 모험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