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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윤 Jun 14. 2021

우투리 러시아를 가다_문화자본이란

천지윤의 해금이야기

4. 우투리 러시아를 가다      

연극 ‘우리나라 우투리’는 2004년 러시아 에카테린부르크 라는 도시에서 열린 연극제에 초대받았다. 러시아항공을 타고 출발했다. 인생 첫 해외공연이니 설레는 마음 뿐 항공사의 컨디션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터미널처럼 복작대는 공항에 내려 들은 이야기로는 러시아항공은 착륙만 무사히 해도 잘했다고 박수를 보내는 불안한 비행기가 대부분이란다. 도착해보니 에카테린부르크는 러시아에서 세 번째 정도 되는 규모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침체된 분위기였다.



위풍당당한 위용의 꽤나 규모 있는 호텔로 인도 받아 짐을 풀었다. 호텔 직원들은 묘하게 불친절했다. 호텔 식당에서는 단출한 코스로 상당히 맛없는 식사가 나왔고 식후에 나온 커피는 이상할 정도로 달았다. 각설탕을 열 개 정도 때려 넣은 듯 소름끼치게 단맛의 블랙커피였다. 동양인이라 이런 식으로 푸대접하고 골탕 먹이는 것이 아닐까 싶은 기상천외한 맛의 커피로 러시아 연주 여행이 시작되었다.



호텔방으로 올라가니 으스스했다. 이제 짐을 풀고 좀 쉬자는 마음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가 녹슬어 물도 제대로 안 나오는 어두컴컴하고 무서운 욕실이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으며 단원들에게 들으니 호텔방에 아무렇지 않게 노크하고 영업(?)하러 들어온 콜걸도 있었다고 했다. 버스에서 극장으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 단원이 뻑치기를 당하기도 했다. 머리를 뻑! 치고 지갑을 훔쳐 달아나는 소매치기의 일종이다. 치안도 불안하고 법이라곤 없어 보이는 엉망진창 러시아에 겁을 잔뜩 먹게 됐다.



연극제에서 배정된 우리 공연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이렇게 어수선한 나라에서 무슨 예술을 하고 연극제를 한다는 걸까? 그리고 이 아침 댓바람부터 대체 누가 공연을 보러 온단 말인가? 의아했다. 황량한 공연장에서 무관객으로 공연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그런데 그 시간, 공연장은 만석이고 매진이었다.


연극 우리나라 우투리_러시아 공연



이 아침에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낯선 나라 한국에서 온 실험적인 연극공연을 보러 이렇게 열성적으로 모여들었단 말인가? 러시아는 그렇게 나를 감동시켰다.




밥은 굶어도 공연 티켓은 사는 사람들이 러시아인이라 한다. 러시아에서 배출된 예술가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작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 피아니스트 호로비츠, 리흐테르 까지. 러시아는 위대한 예술가들의 나라다.



무엇보다 내게 많은 영향을 준 음악 가운데 러시아방송교향악단의 음악이 있다. 나는 어린시절 USSR 러시아방송교향악단 음반을 들으며 자랐다. 음악을 사랑하셨던 아빠가 우리 삼형제를 들려주시겠다고 사온 러시아방송교향악단 클래식전집은 바흐와 하이든부터 베토벤과 모차르트, 쇼팽과 리스트, 브람스와 슈만, 드뷔시 그리고 현대음악인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 프로코예프스키까지 서양 음악사를 아우르는 좋은 음반이었다.



음반 표지는 러시아의 다양한 문화를 담은 사진들이었다. 러시아의 화려한 돔형 건축물과 밍크로 된 두꺼운 모자를 쓴 러시아인, 사열식을 하고 있는 러시아군인, 발레단의 백스테이지를 찍은 사진, 스산한 러시아 겨울 정경 등 러시아 사회와 문화의 면면이 담겨 있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소련에서 러시아로 체제가 바뀌며 격동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내가 경험한 이상한 호텔은 체제가 잡히지 않은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짐작케 했다. 그 속에서도 러시아인들은 밥 대신 공연을 택하거나 열일 제쳐놓고 공연 관람을 하는 민족임을 알게 했다. 이런 것을 두고 대대로 내려오는 문화자본이라고 하나. 그들은 정신적으로 대단히 부유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공연 이후 감상한 안톤 체홉의 ‘갈매기’라는 연극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학교 연극원에서 올려 진 같은 극을 봤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이다. 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작은 나무 의자 몇 개와 단순한 조명만으로 절제력을 발휘한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적막 속에 이어진 대사들은 현대음악처럼 들려왔다. 세련됨과 무게감을 겸비한 현대적인 느낌의 작품이었다.  



작년 가열차게 읽었던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에 새겨진 장중함과 우아한 무게감이 떠오른다. 러시아적인 색채를 곧바로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명확한 예술적인 감도를 가진 나라라 많지는 않으리라. 도시에 감도는 무거운 공기는 하루아침에 빚어진 것이 아니니. 러시아인들이 매서운 추위 속에서 했을 사색의 농도를 짐작케 한다. 세계적인 사상가와 예술가를 낳은 나라의 어수선한 현재와 면면히 내려오는 문화적 DNA와 예술에 대한 열성 모두를 경험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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