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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윤 Jun 21. 2021

샌프란시스코에 가다 - 연주여행 이야기

천지윤의 해금이야기

연주여행 이야기 


1. 샌프란시스코에 가다      

무용을 하는 내 동생 종원의 부름이 있었다. 미국에서 온 안무가가 워크샵을 하러 학교에 와 있다는 것이다. 안무가의 친구인 작곡가도 함께 와 있는데 한국전통음악에 관심이 많으니 해금을 한번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동생과 같은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니 석관동 캠퍼스에서 서초동 캠퍼스로, 강북 끝에서 강남으로 쪼르르 내려가면 될 일이었다. 대학원 시절이니 시간도 여유로웠고, 해외 아티스트와 교류하는 일에도 관심이 있던 터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넓은 스튜디오에 가보니 워크샵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종원은 언제나처럼 땀을 흘리며 너덜너덜한 연습복 차림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켠에는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한 작곡가가 있었다. 쉬는 시간 종원은 나와 안무가 그리고 작곡가를 인사 시켰다. 



작곡가는 해금이라는 악기를 보고 반색을 했다.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 일본인 와이프를 두었기에 아시아 문화 전반과 더불어 한국전통음악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다. 안무가와 무용원 학생들은 땀을 사방으로 튀기며 몸짓에 관한 연구 중인 와중에 나는 해금을 꺼내 에드워드에게 악기에 관한 설명과 전통음악 몇 곡을 짤막하게 연주해주었다. 에드워드는 한국의 피리처럼 생긴 ‘히치리키’라는 일본전통 관악기를 꺼내 소리를 들려주었다. 에드워드는 동양 문화를 사랑하여 그 악기를 연주까지 해내는 좀 특이한 예술가였다. 2시간 남짓 한·미·일간 캐주얼한 문화 교류가 진행되었다. 



며칠 후 내가 몸담고 있던 <한국해금앙상블>의 공연이 있을 예정. 나는 그 공연에서 연주를 할 예정이었기에 에드워드를 초대했다. <한국해금앙상블>은 대학교 3학년 시절 한국예술종합학교 해금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애해이요>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다. 지도교수님의 이끄심과 젊은 혈기의 20대 초반 해금연주가들이 모여 해금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겠다는 마음이었다. <한국해금앙상블>은 <애해이요>에서 개명 후 전통을 이어 올해로 15주년을 맞이한다. 창단 당시 새로운 레퍼토리를 만들어가는 시점이었기에 다양한 시도를 했다. 해금과 탈춤, 해금병창, 현대적인 느낌의 해금앙상블곡 등을 선보이는 공연이었다. 에드워드는 이 공연을 보고 눈이 반짝, 흥미로워 했다. 다음해 에드워드가 살고 있는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제10회 Thingamajigs Festival이 열리니 나를 참여 아티스트로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에드워드는 이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이었다. 에드워드는 페스티벌 관련 자료들을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이름도 희한한 ‘띵가마직스 페스티벌’은 미국과 동아시아간의 문화교류가 주요 과업이다. 이를 믹스해 실험적이고 매우 요상한! 예술 양식을 시도하는 것이 페스티벌의 미션이기도 하다. 망설일 리 없었다. 에드워드에게 이메일로 “그래, 가겠다.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에드워드는 고맙게도 자신의 집에서 지내며 숙식을 해결하라고 했다. 그때는 해외 페스티벌 참여에 도움 받을 수 있는 국가예술기금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무식하면 용감한 걸까. 모아둔 돈으로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왕복 비행기 티켓, 해금, 트렁크 하나를 들고 홀연히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다 #2      



이왕 어렵게 끊은 비행기 티켓이니 가능한 오래 체류하고 싶었다. 내가 가진 예산으로 한 달은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정의 개런티와 숙식제공. 그것만으로도 고마웠고 설레었다. 그렇게 한 달을 에드워드와 그의 와이프 토모코, 무려 돌이 막 지난 아가가 있는 집에서 ‘마음 편히’ 숙식을 했다. 에드워드와 토모코는 12개월 아가와 나를, 애 둘 키우듯 최선을 다해 케어 해주었다. 나도 아이를 낳아 길러보니 돌이 막 지난 아가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빡세고 고된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인지. 그때 얼마나 철이 없었고, 삶의 고단함을 몰랐었는지.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 한달살이가 시작됐다. 



정확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조금 떨어진 오클랜드라는 도시에서 지냈다. 샌프란을 서울로 치자면 오클랜드는 분당이나 일산 정도 되려나. 오클랜드는 샌프란 만큼 화려하지 않고 붐비지도 않은 조용한 도시였다. 도시에 커다란 호수도 있었고 나무와 숲이 드문드문 있기에 자연과 어우러진 곳이었다. 에드워드는 집에서는 육아, 집 밖에서는 극단에서 일을 했고, 작곡을 하고, 자신의 페스티벌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영어가 짧아 7살 꼬마 같은 나를 잘 챙겨주며 오클랜드 지역 예술가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대학 다니며 종종 꿈을 꾸던 것이 미국이나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는 연주가가 되는 것이었다. 거문고 연주가 김진희 선생님의 ‘거문고 탱고’라는 책을 보며 해금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다고 생각 했었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치기가 마구 흐르던 때다.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가야할까?’, ‘그렇다면 어떤 전공으로 가야 하는 거지?’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학부 졸업 후 대학원 과정을 바로 들어갔고, 당시 꽤나 활발했던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라는 밴드 활동을 하다 보니 막연한 꿈으로 고이 모셔둔 상태였다. 



샌프란에 오니 책에 나올법한 자유로운 예술가들을 모두 만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에드워드가 공부한 밀스컬리지(Mills College)는 오클랜드에 있는 학교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가를 키워내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띵가마직스 페스티벌은 이 학교 출신 예술가들의 작은 커뮤니티이자 음악적인 실험을 이어나가는 장(場)이었던 것이다. 에드워드의 소개로 이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음악가, 시인, 무용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을 만나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이 페스티벌에서 루 해리슨의 ‘전폐희문’을 연주하자고 제안했었다. 루 해리슨? 그리고 전폐희문이라면 종묘제례악의 대표악곡이다. 미국인인 그가 내게 이 곡을 제안하는 역전된 상황은 무엇일까. 그에게 악보를 받고 대체 루 해리슨은 누구이며, 전폐희문은 어떻게 아느냐고 추궁을 했다. 루 해리슨(1917-2002)은 이 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한국전통음악에 일찍이 관심을 보여 전폐희문을 주제로 작곡했던 것이다. 에드워드는 이 곡에서 사용될 특수 악기들을 학교 악기고에서 빌리고자 했다. 에드워드와 함께 밀스컬리지를 방문했다. 



악기고에서 거대한 타악기를 빌린 후 음악도서관을 구경했다. 도서관을 둘러보니 국악이론의 대부 격인 이혜구선생의 저서가 소장되어 있었다. 일본이나 중국 전통음악에 대한 책에 비하면 미미한 정도지만 그래도 몹시 반가웠다. 국악을 공부하며 흔히 보아왔던 국악이론서를 미국 도서관에서 발견하는 것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늘 안달복달 해왔던 사물을 보다 큰 조망권을 갖고 바라보는 듯했다. 이런 것을 객관화라고 하나? 우리음악의 자리가 참 작구나, 라고 느끼는 동시에 그 빈자리를 향한 가능성도 느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다 #3      



띵가마직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몇몇 예술가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같은 학교 출신들이거나, 친구의 친구이거나, 이 지역에서 생업과 예술 활동을 이어가는 에드워드의 친구들이다. 그들과 몇 번의 리허설을 함께 했다. 리허설은 오클랜드 어딘가, 아티스트 레지던스에서 했다. 이름하여 타코 리허설! 타코 트럭에서 고수가 잔뜩 들어간 부리또와 타코, 시원한 맥주 한 상자를 리허설 장소로 사가는 것이다. 음악 리허설만큼이나 친구들과 먹고 노는 일은 즐겁다. 루 해리슨의 전폐희문을 이곳 친구들과 연주하고 코로나맥주와 멕시칸 타코를 먹는 밤이 이어졌다. 



페스티벌은 오클랜드의 다양한 장소와 여러 극장에서 공연이 올려졌다. 캐주얼한 블랙박스 형태의 극장이나 소규모 갤러리들이었다. 에드워드를 따라 조그만 극장을 찾아갔다. 지하의 클럽 같은 공간이었다. 내가 연주할 공간이었다. 극장 답사를 마치고 곧 공연날이 다가왔다. 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실험예술가들이 많았다. 띵가마직스가 사랑하는 단 하나의 단어 위얼드Wierd! 그야말로 위얼드한 실험음악과 행위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예술적 기행이랄까, 진지한 실험이랄까. 기행과 실험이 난무하는 공연이 시작되었다. 



나와 같은 날 연주한 곡들은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듯 음악적 상상력을 전복하는 것들이었다. 전에 없던 악기를 만들어 컴퓨터와 결합하여 기이한 사운드를 내는 음악에 어리둥절해졌다. 자신이 지은 시를 낭송하며 움직임을 하고, 그에 반응하는 즉흥연주. 음악과 언어, 움직임이 어두운 공간에 부유했다. 소음과 음악. 퇴폐와 명상. 진지와 장난. 기존의 예술언어를 파괴한 위얼드(wierd)한 것들은 그 경계들을 보란 듯이 넘나들었다.   



종묘제례악은 조선 역대 왕들을 위한 제사 음악이기에 격식의 향연이라 할 수 있다. 근엄한 의례로 몇 시간에 걸쳐 연주된다. 종묘제례악을 연주할 때 대규모 관현악이 동원되고 64인의 팔일무 즉, 무용수가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를 나누어 춤을 춘다. 모두 홍주의라는 빨간 도포자락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쓴다. 띵가마직 페스티벌 속 루 해리슨의 ‘전폐희문’. 나는 이 모든 격식을 버리기로 했다. 이 시절 밴드 활동을 하며 즐겨 입었던 부츠컷 블랙진에 금빛 오프숄더 탑을 입고 헤어스타일은 처피뱅 단발. 나는 이 코스튬으로 해금을 연주했고, 에드워드는 한국의 피리 대신 일본의 히치리키를 불었다. 또 한명의 타악연주가는 대고(大鼓) 대신 커다란 서양식 북을 쳤다. 격식과 의례는 온데 간데 없다. 전폐희문의 변신. 완전히 새로운 얼굴로 오클랜드의 허름하고 힙한 극장에서 전폐희문이 울려 퍼졌다. 

 


전폐희문은 복잡한 서구의 현대음악을 다루던 한 음악가의 생애에 변곡점이 될 만한 영적인 음악이었으리라. 그의 사후에 나와 에드워드라는 작곡가가 연결되어 오클랜드 작은 극장, 실험예술가들 앞에서 이 음악이 연주되었다는 것은 참 희한한 일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문화의 속성일 것이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뒤섞이며 새로운 영감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는 것이 그것의 운명이리라.  



샌프란시스코는 어디를 가든 친절하게 잘 웃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이었기에 더 없이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꼭 이 계절이 아니어도 캘리포니아는 기후로 축복받은 땅 아닌가. 캘리포니아라면 매일 좋은 컨디션과 산뜻한 기분으로 생글생글 잘 웃고 말도 잘 걸며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 경계심 없이 잘 섞이는 만큼 서로의 문화를 배우고 섞는 일도 쉬웠을 테다. 그래서인지 캘리포니아에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크로스오버 예술에도 열린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런 분위기에서 밀스컬리지의 학풍이라던가, 띵가마직스 페스티벌의 전통이 이어졌을 것이다. 



띵가마직스 위얼드 라이프를 경험하며 다양한 삶의 방식과 예술양식을 볼 수 있었다.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며 자신의 생을 걸고 실험하는 예술가 친구들의 삶은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추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에 충실히 응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형식주의에 갇힌 삶을 거부한다. 추구하는 예술도 삶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자유를 향한다. 커다란 예산안을 가진 것이 아니라도 꿋꿋이 10년이 넘게 페스티벌을 꾸려간다. 자신의 뜻을 이루는 방식은 작아도 오래 지속하고 주변 친구들과 연대하며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는 무한대로 펼쳐진 각자의 세계가 있음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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