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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윤 Jun 23. 2021

비빙 입단과 스테레오 까페

직업으로서의 해금연주가_천지윤의 해금이야기


비빙 입단과 스테레오 까페

대학원시절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았다. 논문학기로 넘어갈 즈음은 졸업 연주도 마쳤겠다, 심리적으로도 편안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가 연희동에 살았다. 집 앞에서 603번 버스를 타고 연희104고지에 내려 쭐래쭐래 걸어 친구를 만나러 다녔다.



악단에 취직하여 사회인이 된 것도 아닌, 음악활동을 느슨하게 하고 있는 두 명의 백수(?)는 한껏 게으름을 부리며 연희동의 정취를 느끼곤 했다. 연희동, 연남동은 지금에 와서 수많은 까페와 식당이 빼곡하게 들어선 핫 플레이스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듬성듬성 까페와 식당이 있던 시절이다. 화교가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니 유서 깊은 중국집부터 멋진 주택을 개조한 근사한 레스토랑도 있었다. 다만 그 비율이 지금의 10분의 1정도로 조용하고 한산했다.



우리는 연희104고지 정거장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 ‘스테레오 까페’라는 곳에 정을 붙였다. 배우 이나영을 닮은 신비로운 언니가 주인장이었고 때로 그녀의 남자친구가 조용히 원두를 볶는 곳이었다. 요즘 커피 맛 좀 낸다는 까페에 있을 법한 위엄 있는 로스팅 기계가 아닌, 성글은 철망에 원두를 넣고 난롯불에 볶고 튀기는 방식이었다. 커피 맛을 몰랐던 그때 처음으로 핸드드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강배전, 약배전이라는 말도 배웠다. 주인장 언니와 남자친구는 손재주가 좋았다.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그들은 까페 내에 있는 모든 기물과 가구를 만들어 썼다. 목공과 페인트칠, 테이블과 의자, 조명까지 커플의 심미안과 손맛이 스민 특별한 것들이었다.



이 까페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물건은 LP 턴테이블이었다. 플레이리스트는 언제나 훌륭했다. 이게 무슨 연주일까? 마음을 확 사로잡는 그 음악은 키스 자렛의 일본 투어를 담은 음반이었다. 명반을 알아보는 귀와 특별한 취향이 있던 주인장 언니 덕분에 새로운 음악가들을 내 20대에 만날 수 있었다.



스테레오 까페에 친구와 노닥이며 앉아 있노라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곳은 아날로그 그 자체였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두 남녀의 마음이 그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해질녘 그곳에 앉아 턴테이블에서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다. 바쁘고 조급하게 살아왔던 날들의 맥을 놓고 이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스테레오 까페에서 노닥거리던 어느 날. 친구와 수다를 나누던 중 “안은미라는 현대무용가가 있는데, 그 분이 하이델베르그라는 도시로 해외 공연을 간대. 그 공연에 참여할 해금연주자를 구한대.”라는 말을 건넸다. 순간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심장박동도 빨라졌다. “나, 나, 나,,,나 하고 싶어!” 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은미 선생님께 오디션 의사를 전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공연이 어떤 음악그룹과 같이 하는 것 같던데, 장영규(현 이날치 그룹의 리더이자 베이시스트)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음악감독이고 재미있는거 많이 하는 것 같아.”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연희동 친구의 추천으로 장영규 감독님과 보통의 만남이 몇 차례 있었다. 장감독님의 작업실에 초대 되었다. 첫 만남은 뜻밖의 장면이 연출되었다. 장영규 감독님은 냉동고에서 유산지에 고이 쌓여있던 참치횟감을 꺼내었다. 실험용 흰 고무장갑을 끼고 번쩍이는 일본제 회칼로 알맞게 얼어 있는 참치 살을 ‘슥슥’ 썰어주셨다.



음악적인 질문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장감독님, 나, 친구는 묵묵히 ‘맛있다!’를 연발하며 참치회를 먹었을 뿐. 입단 오디션 같지 않은 입단 오디션이었다. 맛있게 먹을 줄 아느냐가 선발의 기준이었을까? 스테레오 까페에서 시작된 비빙과의 인연은 8년간 계속 되었고 여러 도시를 투어하며 맛있는 요리를 먹게 된다. 물론 멋진 연주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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