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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윤 Jul 05. 2021

하이델베르그 성成 페스티벌을 가다_2

천지윤의 해금이야기


요새에서      



투어 일정은 한 달이었지만 공연 횟수는 7회 정도였다. 리허설 하는 기간을 넉넉히 일주일 정도로 잡았고 이후 며칠 간격으로 공연을 올리는 일정이다. 하이델베르그 공연 이후에도 근교로 이동해 또 한 번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가 공연할 사방이 탁 트인 성의 요새. 규모에 맞춰 1회당 50인 내외의 객석이 오픈되었다. 야외 공연이니 비가 오면 공연이 연기될 소지가 있다. 하이델베르그는 기후가 온화한 편이지만 오락가락 하는 비가 잦았다. 비가 공연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공간이다. 



도착한 첫 일주일은 공간에 적응하며 리허설을 해나갔다. 매일 키친에서 각자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후 악기를 메고 성으로 출근했다. 중세시대 지어진 이 성은 빙글빙글 돌계단을 걸어 올라야 요새에 이른다. 해금, 피리, 장구, 가야금, 벨, 실로폰, 리코더, 나각, 나발 등의 여러 악기가 연주를 위한 테이블에 차려졌다. 객석에서는 탁 트인 스카이라인과 도시의 적색 지붕이 촘촘히 보인다. 요새 정 중앙에는 초록잔디가 둥글게 깔려 있다. 이 초록의 공간은 현대무용가 안은미 선생님이 춤을 추는 무대로 연출된 것이다. 테이블이 깔린 연주석에 앉아 사운드 체크를 하고 안은미 선생님이 비빙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리허설이 매일 진행됐다. 



리허설 도중 쉬는 시간이면 하이델베르그 시내를 한참이고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하늘빛깔이 핑크빛부터 푸른빛으로 다채롭게 바뀌고 구름 사이에 해가 숨기도, 다시 발광하는 빛의 광선을 내뿜기도 했다. 하늘빛이 꾸물꾸물 먹색이다 싶은 날은 저 멀리 근처 도시에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이도 한다. 



우리가 차려놓은 많은 악기들과 마이크 시스템들이 비를 맞아서는 안 될 일이다. 변덕스러운 비 덕분에 이 테이블에 한상 차려놓은 악기와 마이크 일체를 성 안으로 들여놓았다가, 비가 그치면 다시 한상 차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는 날도 있었다. 매일 성을 향해 악기를 올리고, 요새에 펼치고, 비가 오면 걷고, 그치며 펼치고, 숙소를 향해 악기를 내리는 하루하루였다. 나중에는 꾀를 내어 테이블을 모두 덮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비닐을 준비했다. 기습적으로 비가 내리면 비닐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사방에서 비닐을 잡고 날듯이 테이블 위의 악기를 덮어 놓게 되었다. 성의 낭만만큼이나 성가신 일이기도 했다. 



지나고 보면 편안하고 유려하게 흘러가던 날들은 태연하게 잊혀지고, 고생스러웠고 녹록치 않았던 날들이 삶의 흔적으로 남는다. 소리를 내며 느꼈던 감흥보다 날다람쥐처럼 비닐을 펼치던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키친에서       



리허설이 몇 차례 진행되는 동안 우리에게는 한 가지 루틴이 생겼다. 리허설을 마치고 하산하여 숙소로 돌아가는 퇴근길에 반드시 마트에 들려 장을 보는 것이었다. 참치회동으로 오디션을 진행할 정도로 미각에 예민한 비빙이었다. 마트에서의 시간은 공연장에서의 시간만큼 재미있고 중요했다. 음악감독님의 지휘 아래 마트에서 장을 보며 메뉴를 정하기도 하고 좋은 식재료를 감별해냈다. 한국에는 없는 다양한 채소와 치즈, 귀여운 패키지의 유제품, 다양한 향신료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 했다. 마트 쇼핑의 화룡정점은 맥주 사재기. 남성 멤버들은 자신의 몸만 한 배낭에 맥주를 터질 만큼 사오곤 했다. 물보다 맥주가 싸다는 독일. 맥주의 나라이니 그럴 만도 했다. 



식사 당번, 설거지 당번은 순서대로 착착 돌아갔다. 12인이 모두 안기에 역부족인 작은 키친에 모여 오손도손 식사를 만들어가며 매번의 식사시간을 즐기는 것은 하루의 긴장을 풀고 여유를 즐기는 시간이었다. 메인 식사는 주로 파스타였는데, 이 파스타가 매일의 식재료에 따라 변주되곤 했다. 기본 재료인 싱싱한 토마토와 다양한 종류의 치즈, 루꼴라 만으로도 단정한 가정식 파스타가 만들어졌고 매일 먹어도 맛있었다. 음악에도, 요리에도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음악감독님의 요리 축복(?)이 매일 내려졌고, 멤버들은 망극하게도 맛있게 먹는 것으로 화답하는 나날들이었다. 



식사 후 어김없이 기나긴 맥주타임으로 이어졌다. 며칠 쟁여두고 마시자는 각오로 맥주를 냉장고에 가득가득 채워두면 어김없이 하룻밤 새에 모두 먹어치우곤 했다. 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맥주를 마셨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갔을까. 이야기들은 기억 속에 모두 휘발되고 말았지만, 해가 유난히 길어 낮인지 밤인지 구별이 되지 않던 유럽의 깊은 밤, 수런대던 분위기만큼은 생생하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찾아 살아온 사람들. 남들과는 부디 다르기를 희망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맥주타임은 멤버들 각자의 목소리와 표정, 몸짓과 주장을 한껏 펼쳐내는 자리였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조금. 대신 사랑에 관한, 쇼핑에 관한, 오늘 먹었던 것 중 가장 특별했던 것에 관한, 내일 먹을 것에 관한, 서로의 재미난 점에 대한 이야기가 넘치고 흘렀다. 많이 웃고 떠들었다. 키친은 우리의 진정한 백스테이지. 키친에서의 밤은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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