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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윤 May 19. 2021

포(匏) 원산 | 해금에 관하여

천지윤의 해금이야기

포(匏)_원산      



원산(遠山)은 해금의 울림통에 얹어진 나무 복판 위에 솟은 작은 산이다. 두 개의 옴폭 패인 분화구 같은 홈이 두 줄을 떠받치고 있다. 종종 대화를 나누는 법대 C교수님은 말씀하신다. “원산(遠山)은 먼 산이잖아요. 해금소리를 듣노라면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갈대소리 같기도 하답니다. 그래서 원산에 그런 한자가 붙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 교수님은 음악을 통해 인문학적 상상의 지평을 넓힌다 하셨는데 내 음악적 상상력에도 한 뼘 뜻을 보태어 주신다. 




원산은 해금의 음색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아에서 감자비까지 내려온 줄을 떠받치며 복판을 통해 울림통까지 소리를 이어준다. 작지만 중요하다. 서양 찰현악기인 바이올린·비올라·첼로에도 모두 이러한 역할을 하는 부품이 공통적으로 있다. 악기 본체에서 삐죽 솟아 있는 나무 조각을 본 적 있을게다. 브릿지(Bridge)라 불린다. 원산과 마찬가지로 현과 본체의 울림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해금의 원산은 박을 재료로 하기도 하고 대추나무를 사용하기도 한다. 어떤 나무를 재료로 사용했느냐에 따라 음색과 볼륨이 결정된다. 나무를 깎아 자유로운 사다리꼴을 갖춘다. 여기에 줄이 지나갈 수 있는 홈을 살짝 패어 만든다. 사포질을 해서 높낮이를 조정한다. 가로 3cm, 세로 2cm, 두께 1cm 정도를 기준으로 조금 더 크기도, 작기도 하다. 엄지손톱만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해금이 독주악기로서 무대를 장악해야 하는 경우 음색이 개성적이고 볼륨이 풍성해야 한다. 이럴 때에는 박 원산을 사용한다. 박은 ‘흥부와 놀부’의 초가지붕에 주렁주렁 열리는 그 박이다. 박의 꼭지 부분을 잘라서 그 속을 나무로 채운다. 박 원산은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모양새다. 볼륨이 큰 소리를 내려면 풍만한 원산을 고른다. 원산과 복판이 만나는 면적이 넓직한 것이 든든하다. 활질이 강하더라도 비틀거리지 않고 힘 있게 버텨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합주 음악에서는 다른 악기들과 음색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전통음악에서 해금의 역할은 대금과 피리의 숨 자리를 메워 주고 대찬 소리 가운데 중간 레이어를 담당했다. 가야금·거문고가 만들어 내는 소리의 점과 여음, 대금·피리처럼 관악기가 뿜어내는 선을 이어주기도 한다. 해금은 매개(媒介)하는 역할로 존재해왔다. 그러니 주장하기 보다는 잘 들어주고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럴 때는 대추나무로 만들어진 얌전하고 날렵하게 생긴 원산을 고른다. 단정하고 깔끔한 음색을 내려면 원산의 모양도 그래야 한다. 


이제는 박이 귀해졌다고 한다. 악기사에 가면 사장님과 대화가 무르익을 때 즈음 여쭤본다. ‘혹시 좋은 박 원산 있을까요?’ 하면 ‘에헴-’하며 은밀하게(?) 꺼내 보여주신다. 너 댓개쯤 되는 원산. 보석가게에 온 마냥 날카로워진 눈과 손의 감각으로 원산을 고른다. 내게 원산 상자는 보석 상자와 다름없다. 실제로 청색 주얼리 상자를 애용한다. 아끼는 제자가 입시를 준비할 때 이 상자를 열어 잘 맞는 원산을 골라주며 음색에 대해 상의한다. 악기와 찰떡으로 잘 맞는 원산을 발견할 때의 기쁨은 크다.  


나 역시 스승님께 이런 내리 사랑을 받았다. 학부 수업 시간, ‘원산 갖고 있니? 한번 보자’ 하셔서 나는 원산 케이스를 열어보였다. 열 개쯤의 원산이 있었다. 모양과 크기가 다양했다. 그 원산 하나하나를 끼워 보이시며 저마다 다른 소리의 맛을 알려주셨다. ‘이 소리는 멀리가지?’, ‘이 소리는 볼륨은 작지만 단단하고 야무지네.’, ‘이 소리는 매끄럽지만 초점이 없어구나.’ 소리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스승님께서 원산을 갈아 끼우며 소리의 다름을 차분히 말씀해주시던 순간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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